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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봄 여름 가을 겨울
김 영 관 (소설가)
‘속도계에 찍혔을까, 찍히지 않았을까?’
그가 언덕을 내려올 때는 가속기를 밟지 않았지만 거의 80킬로였고, 언덕을 오를 때쯤엔 70킬로였는데 갑자기 그 속도계가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었다.
“제기랄!”
그는 살짝 제동기를 밟았지만, 이미 찍혔을 것 같았다.
‘운을 믿어야지. 속도계에 찍힌 사진 가운데 번호판을 알 수 있는 것은 반밖에 안 된다고 하잖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은 언짢았다.
아침부터 길은 붐비고, 운전은 모두 개판이고, 그도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지만, 버릇 때문인지 본디 아기똥해서 그런지 등받이를 뒤로 한껏 젖힌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넓은 길(8차선)에 속도 표지판은 60킬로로 되어 있을까? 학교 앞은 30킬로이지만 예술의 전당 앞이라 60킬로? 아니면 모두 차를 지랄 같이 모니까 60킬로?
자주 다닌 놈들은 약아서 안 찍히겠지만, 처음 그 길을 가거나 아주 오랜만에 가는 사람은 찍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러면 곳곳에, 여기는 예술의 전당입니다, 조용하세요, 라든가, 모두 차를 개판으로 몰아서 60킬로, 라고 좀 써 붙여 놓으면 좋지!
그가 그게 그렇게 언짢았던 것은, 바로 성을 낼 아내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날아올지도 모를 그 빨간 딱지의 범칙금 6만원이란, 아아 정말이지 아깝고도, 두렵고, 가슴 아픈 것이었다.
‘미리부터 두려워할 건 없어, 안 날아올 거야.’
그는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기에 바빴다.
‘이거, 나 원, 날마다 조마조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켜 놓은 라디오에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사람을 돕는 일이지만, 사람 마음을 살게 하는 것이 더 크게 돕는 것이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아, 그래 난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복을 받을 거야.’
그는 대번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땡추중이 라디오 안에서 그만 입 다물고 있지를 못하고,
“네가 먼저 악한 마음, 독한 마음을 풀어야 다른 사람의 악한 마음 독한 마음도 풀린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죄도 복도 다 마음에서 짓는 것이다.”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몹시 두려웠다.
그가 먼저 모질게, 못되게 차를 몬 것은 아니지만, 그건 등받이에 한껏 기대앉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운전대를 꽉 잡고 막히는 길에서도 차가 나가는 속도를 줄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독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짢고 괴로웠던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이 이미 지어놓았던 것이며, 범칙금 6만원의 빨간 딱지가 날아오도록 만든 죄도 다 그의 마음이 지은 것이니까!
‘아아, 이제 제발 그 빨간 딱지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 마음을 이렇게 괴롭히는 것도 죄악이야!’
그는 고개를 흔들며 떨쳐 일어났다.
그는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 딱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호두까기 인형
그걸 그는 아이들과 같이 보았다.
지금은 거기에 호두까기 인형이 왜 나왔는지, 호두를 까다가 인형이 되었는지, 호두를 까던 인형이 왜 병정이 되어 나쁜 놈을 물리쳤는지, 그게 또 얼음판 위에서 춤을 추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는 가물가물했다.
“그런 곳에는 잘 가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렇게 물을 것이다.
“네, 하지만 누군가가 공짜로 준 표가 있었고, 또 어버이라면 한번쯤 아이들과 그런 곳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공짜로 주었다는 것은 안 잊고 있네.”
“네, 내가 돈 내고 갈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호두까기 인형 동화도 모르면서 무슨 이야기를 쓴다고 그러는가?”
“아뇨, 아이들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래 되니 그것도 잊히고 마네요.”
“그래?”
그들은 그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속도위반을 한 적이 많은가봐.”
“누구나 10년에 한두 번은 하지 않나요?”
“글쎄.”
그는 알고 있다, 그들이 그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것을. 그건 그가 늘 보아 왔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예술의 전당은 물고 늘어지는 건가?”
“음, 거기가 말이죠, 진짜 예술의 전당일까, 미심쩍어서요.”
“음, 자네 이야기가 거기서 춤이나 노래로 나온다면 말이 달라지겠지?”
“글쎄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자네 가을을 타나?”
“네?”
“가을이 오면 나이든 사람들이 쓸쓸해지고 추워지는 거 말이야.”
“네, 그런가 보군요.”
그의 나이도 쉰을 넘었다.
“이야기책은 연구 실적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런 전화를 다른 대학 5층 계단에서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책이든 그게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라고 전화했습니다.”
“네, 그럼 그냥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는 상냥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래, 다 잘될 거야.’
그가 그렇게 믿어온 것이 이 가을로 이미 스무 해째였다. 그래서 그가 올해는 가을을 몹시 타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말 너무들 하는군.’
그는 이제 가슴 속에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어디 그만 그러랴!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켜야 할 차례가 있고, 그에게는 그가 지켜야 할 차례가 있었다. 어느 쪽이건 한쪽은 빛나는 삶이며, 한쪽은 문드러진 삶이었다.
“이제 창문을 닫아야 할 때가 되었잖아요?”
“놔둬, 가을을 더 보게.”
그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창밖은 11월, 그는 다리가 시렸다.
‘이거, 뭘 하나 더 입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입고 있던 꾀죄죄해진 운동복을 벗고는 속바지를 하나 입고, 그 위에 다시 새 체육복을 입었다. 그건 딸이 고등학교 때 한번 입고 안 입었던 것인데, 체육복 바지는 다 비슷비슷하고 또 그도 키가 작아서 늘 잘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당신 옷은 참 간단하네, 아래위로 아들, 딸 체육복 입으면 되니까.”
아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반소매 윗도리는 아들 여름 체육복이었고, 그는 그 위에 다시 딸 체육복을 또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옷이 없나?”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옷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왠지 그 체육복이 편했다.
올해 늦가을은 아주 천천히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 아직 쉰둘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과 딸의 체육복을 입은 키 작은 글쟁이가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만원이나 재산세가 또 나왔네, 몇 달 전에 안 냈나?”
아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영수증 모아둔 곳을 찾고 있었다.
아직 속도위반 딱지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간 내내 집안을 들쑤셔도 그 영수증은 나오지 않았다.
“안 낸 건 아냐?”
그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통장과 다른 영수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에이, 내가 가서 통장에 돈 있나 보고, 다시 내고 올게.”
하고 말했다.
세무사나 회계사조차도 그런 일은 귀찮을 것이다.
‘이거 두 번 내는 건 아닐까?’
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돈을 다시 내자고 마음을 먹으니 야릇하게도 속은 편했다.
‘참 야릇한 노릇이군. 인두세를 마구 거두어들이는 벼슬아치들은 믿을 수 없는데도 말이야.’
밖은 가을 햇살이 내비치고 있어서 걸으면 걸을수록 그는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지만, 얼굴을 펴고 걷고 있지는 않았다. 아까 그가 문을 나설 때 아내의 한숨은 땅이 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키도 작고 몸매도 없는 그가 그 우중충한 체육복을 입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제기랄!
그러나, 그가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고, 아까 시리던 오른쪽 다리도 말짱한 것 같았다.
“그래, 돈은 냈나?”
“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럴 때, 그 속도위반 딱지가 날아온다면 아내는 벌컥 뒤집히고 말 것이다.
‘아아, 하늘은 푸르고 고마워라.’
그는 아까 보았던 파란 가을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삶이란 이렇게 또 한 발 나아가는 것이지.’
그는 이제 제법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당신은 뭐가 좋아서 휘파람까지 불고 있나?”
아내도 살짝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휘파람을 더 세게 불었다.
이번엔 아내가 활짝 웃었다.
아내는 웃는 게 참 예뻤다.
그렇지만 성이 나서 거세게 대들 때,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게 다 돈 때문만 일까?’
다음 날도 그는 밤새 더 추워진 밖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물든 채로 겨울이 들이닥쳤군.’
그날, 그가 학교에서 설탕 통만한 크기의 꾸러미를 받았는데,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는 그도 몰랐다.
“세 사람 가운데 이 꾸러미 안에 든 것을 가장 가깝게 맞히는 사람이 그것을 갖게 될 것이다.”
그가 아내와 딸과 아들에게 말했다.
그 다음 날, 식구가 모였을 때, 아내는 그걸 비타민 약, 딸은 찻잔, 아들은 차가 들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걸 풀어보니 안에는 큰 찻잔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모두 크게 그렇게 바라지도 않았다는 투였다. 그건 그나마 그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오랜만에, 뜻밖에 받은 것이어서 그는 처음부터 기쁘게 이번 <선물 꾸러미 맞히기> 겨룸을 마련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가 막걸리를 많이 마셔 취했고, 아내에게 쓸데없이 잔소리를 하다가 된통 당했는데 얼마나 거세던지 그는 꼼짝도 못하다가, 그 다음 날 아침 살살 아내를 달래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
속도위반 딱지는 열흘이 다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고, 얼마 전에 갑자기 뒤늦게 내고 말았던 30만 원이나 되던 재산세도 이제 그의 머리 속에서 잊히고 있던 날이었다.
“먹다 남은 걸 이렇게 많이 버리면 되나!”
그가 마음먹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는 아침을 설익은 밥과 김치와 멸치로 먼저 먹었는데, 그 밥은 그가 며칠 전에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거 다 못 먹는 거다, 밥이 설익어서.”
아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라면은 뭐야? 처음부터 좀 적게 차리면 되지.”
아내는 밥과 라면을 거의 한 그릇이나 버렸던 것이다.
“또 대든다, 대들어. 그냥 잘못했다고 말하면 되지.”
그가 그렇게 말해도, 아내는 성이 나 있었다.
제기랄!
삶 속에는 늘 이런 게 뒤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한동안 잘 되풀이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요즘 그의 아내가 바깥일이 많아서 몹시 힘이 든 것 같았다. 그건 또 그가 돈을 잘 못 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이제 곧 책이 많이 팔릴 거야.”
하고는 이곳저곳에 그가 새로 쓴 이야기들을 또 보내는 것이었다.
“그저께 밤에는 똥을 한 무더기 바지에 싸는 꿈을 꾸었지. 어제는 5천 원짜리 종이돈을 물에 빠뜨리는 꿈을 꾸었고.”
“똥을 한 무더기 싸는 꿈은 돈이 가득 들어온다는 말인데.”
아내가 그의 말을 듣고는 이제 성이 풀렸는지 꿈 풀이를 했다.
“물에 빠진 돈도 귀찮아서 그렇지 건질 수는 있었어.”
그도 애써 그 돈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요 며칠 동안 힘이 들어서 그런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속도위반과 재산세와 설탕 통만한 선물 꾸러미를 놓고 겨루기를 시켰던 것과 똥 꿈과 아내가 지친 것은 다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야.’
그는 또 억지로 우겨대고 있었다.
‘삶은 우겨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야기를 짓는 것은 우겨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재미있게 쓸 수 없을 때는 물러서야지.
그는 땅콩사탕 여섯 개를 먹고, 다시 이야기를 쓰려고 돌아와 앉았다. 여느 때 같아서면 막걸리를 처먹었겠지만, 그의 아내가 고이 잠들어 있는데다 얼마 전에 취해서 해롱해롱 까불대다가 된통 걸렸기 때문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삶이란, 한여름 햇볕이나 비바람 같다가도 가을 나뭇잎이나 시린 겨울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따뜻한 봄바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끝 - 201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