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과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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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홍길동

김 영 관 (소설가)

2008년

허균과 홍길동

지은이 : 김 영 관(소설가)

1960년생. 문학박사.

1998년 미국 크랩 오쳐드 리뷰 아시아 작품 특집에 <황색도시> 발표.

1999년 슬로바키아 문화시디에 <곱사등이) 발표.

소설집 <회오리바람>

차 례

1. 허균과 홍길동 --- 5쪽.

2. 이상과 윤동주 --- 28쪽.

3. 도스토예프스키 --- 44쪽.

4. 사 랑 ---------- 54쪽.

5. 금 관 ---------- 60쪽.

6. 역 사 --------- 66쪽.

7. 탐욕과 건망증 ---- 74쪽.

8. 우수와 오수 ------ 81쪽.

9. 손자와 현자 ------ 90쪽.

허균과 홍길동

김 영 관

허균과 홍길동

힘없는 작가는 기침을 콜록거리는 아픈 마누라에게 잔소리만 한다.

못난 놈이다.

보잘 것 없는 놈이다.

길거리에서 누가 넘어질까 발에 차이는 돌을 한번 치웠다고 내세울 셈인가? 아무리 써도 어차피 큰일을 해내지 못할 테니까 그냥 작은 일들만 쓰기로 했다고?

못난 작가라 손가락질해도, 보잘 것 없는 작가라 욕을 먹어도 하는 수 없다. 이미 그 전에 못난 남편, 생계비 하나 제대로 못 버는 보잘 것 없는 남편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내는 아픈데도 마늘 한 접을 까고, 김치를 새로 담았다.

나는 그런 데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왜, 아프다면서 일을 하는가.”

하는 잔소리뿐이다.

큰일은 멀찌감치 놓아두자. 큰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해낼 것이다. 나는 항상 그들의 아픔을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 물론 아프리카의 가난과 내전 문제까지 쓴 것은 아니지만, 가난의 원인과 결과, 전쟁에 대해서는 많이 써왔다. 자신의 몸 하나만 온전하기를 바라는 무리들과는 다르게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돈을 못 벌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선비들은 가난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리는 부자다.

“차는 무슨 찬가?”

“경차요.”

선비라면 마차를 탔을 것이다.

아내는 경차에 만족한다.

“걸어 다니는 게 좋아요.”

내 말에 부자는 고개를 돌렸다.

‘저러니 귀가 일찍 멀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눈이 원시가 됐어?”

부자라고 말까지 놓아도 되나?

“글을 너무 써서 그렇다.”

나도 반말로 말했다.

“그렇게들 싸우지 마시오.”

선비가 말렸다. 그는 하얀 도포에 갓을 쓰고 있었다. 이 선비도 아직 마차가 없었다.

“글은 생각으로 쓰기 때문에 피곤해지기 쉽다.”

“글 쓰는 건 자네뿐만이 아니야.”

부자가 쏘아붙였다.

“안다. 써서 약이 되는 자와 독이 되는 자가 있다.”

나는 선비에게 언제든지 경차를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옛날에도 마차를 샀나요?”

“그럼. 대장간에 돈을 주고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때도 큰 수레를 끌면 으스댔나요?”

“지금처럼 그런 무리들이 많았지.”

이 때 부자는 큰 차를 끌고 왠지 휑하니 달아나듯 가버렸다. 무엇이 그리 겁이 났는지 하여간에‘큰 수레를 끄는 으스대는 무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달아났다.

선비는 수레가 없어도 으스대지 않았다.

“그러면 중차를 끄는 무리들은 백성인가?”

선비가 거리를 꽉 메운 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착한 백성, 약은 백성, 못난 백성 섞여 있습니다.”

“경차는 별로 보이지 않는데?”

“백성이 건방이 들어 그렇습니다.”

선비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차를 보고 있으니 목이 칼칼해지는데 어디 가서 막걸리라도 한 잔 했으면 좋겠구먼.”

“차 뒤에서 나오는 검은 먼지 때문입니다. 큰 차일수록 뒤로 나오는 먼지가 많습니다. 막걸리는 제가 한잔 사죠.”

부자는 이 모든 모습을 길 건너편 큰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두고 보자. 감히 너희들이 나를 무시해? 이 부자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가르쳐주지. 그리고 지금 시대는 부가 권력을 다스린다는 것도.”

힘이 있는 자가 잘못을 하면 가끔 잡혀 들어가기도 했지만, 부자는 그렇지 않았다. 설사 잡혔다 하더라도, 권력자보다 더 빨리 풀려나왔다. 검은 돈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 부자는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고, 집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돼지처럼 욕심이 많아 도울 방도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건방이 들지 않은 백성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는 부자는 없을까? 있다. 적지만 있다.

나도 무언가 서두른다.

과연 작가의 사명이 서두르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내가 만약 훌륭한 작가라면 사명을 다해야 한다. 먼저 제 스스로를 돕고, 스스로 할 일을 해야 한다.

막걸리가 거나하게 취해 가면서도 이 선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은 전혀 양보심이 없이 자기만 아는구먼.”

선비는 한번에 현대의 병폐를 집어내었다.

“이기주의의 극치죠.”

내가 맞받아쳤다.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죽는 줄 아니, 그래가지고도 불알 찬 사내라고.”

“불알 자랑 그만하게.”

“예? 하하하.”

“허허허.”

나와 선비는 막걸리를 따르고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깥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그런지 대폿집 창밖은 뿌연 김에 서려 있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게. 그냥 허 선비라고 해두지.”

“그럼 허 자 쓰십니까?”
“쓰는 게 아니고, 그냥 허 씨네. 이 사람은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은 놔두고 왜 자꾸 한자말을 쓰려 하는가.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명나라 사대주의를 못 버렸구먼.”

“100년이 아니라 500년이겠죠. 그리고 명이 아니고 지금은 그냥 중국인데요.”

“자네 불알은 참으로 커 겄네.”

“예? 하하하.”

“허허허.”

우리는 이렇게 해서 또 한바탕 웃고 말았다.

나는 이 선비가 허생전에 나오는 허 생원이든지, 아니면 최초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라고 생각했다. 선비치고는 하는 말이 아주 걸쭉했기 때문에 허균일 가능성이 많았다.

허균이 누군가?

바로 혁명적 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려다 죽은 자가 아닌가!

그 주인공 홍길동은 바로 썩어빠진 양반사회를 혁파하고, 이상향 율도국을 세운 자가 아닌가!

“그 썩어빠진 사회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 보셨죠?”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하군.”

“허 선비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망했죠.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왜놈이 다스렸으니까요.”

나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선비에게 슬슬 말을 놓기 시작했다.

“뭐라? 결국 조선이 망했다고?”

“아이참,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해요. 음, 들어보세요, 그럼. 간신들에게 예종, 정조 임금이 독살되고, 부패한 조선에서 땅을 빼앗겨 먹고 살지 못한 백성이 거지꼴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다 북간도로 가기도 하고, 굶어죽는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더니, 드디어 1811년 홍경래가 유민과 뜻있는 선비들을 모아 민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썩어빠진 조선에는 청나라와 왜놈들이 들어와 저희들끼리 청일전쟁을 벌여 결국 왜놈들이 조선을 차지하고 말았죠. 게다가 명성황후는 찔러죽이고 고종 임금은 독살하고, 순종 임금에겐 아편을 먹이고.”

나는 거기까지 단숨에 말하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허 선비는 이런 내 모습을 비장하게 바라보다 그도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 들이켰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야!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으로 그 왜놈들에게 돈과 땅을 받은 친일파가 바로 이 부자 집안이었다.

“내 아내와 어린 자식도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서 죽었으니. 나라는 부모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 선비들이 억울한 것을 참고 힘든 세월을 견디다 보면 신열을 앓고 잇몸은 터지기 일쑤였지만.”

“지금 나도 그렇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글을 쓴다고 터진 아래 잇몸에, 스-, 하며 바람을 불어넣었다. 허 선비의 아내와 아기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은 오늘 처음 듣게 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게 아니겠나.”

“술을 마셔 취기와 배를 불린다는 건 포만감과도 관계가 있어요. 수놈의 만족감이랄까.”

나는 일부러 딴소리를 좀 했다.

“자네 지금 선비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나?”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 아시죠? 꽉 차면 저절로 넘친다는 것. 마음도 몸도 꽉 차면 저절로 비워진다는 말입니다.”

“심신일체라. 그러나 겸손으로 마음을 채워야지. 욕심과 방자함으로 채워서는 안 되지.”

“옳은 말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막걸리 잔을 벌떡 들어올려 잔을 부딪쳤지만 허 선비는 깜짝 놀라며,

“이 사람 참, 사발 깨져.”

하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하하하.”

하며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뭐야! 그 자가 홍길동을 쓴 허균이라고?”

친일파가 이 부자에게 물었다.

“그 놈이 바로 일본 쪽에 홍길동을 시켜 율도국을 세운 놈이라 말이지?”

이 부자는 친일파가 뭘 착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딱히 꼬집어낼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허균이 홍길동을 부하로 써서 율도국을 세우도록 한 게 아니고, 홍길동전이라는 이야기를 쓴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떨까 싶기도 하고, 무식한 것이 드러날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잠자코 넘어갔다.

“허균과 홍길동을 당장 잡아들여라!”

이래서 이 부자는 뜻밖에 그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한양감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허균과 홍길동을 어디 가서 잡는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부자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아니야. 아까 낮에 길거리에서 매연과 공해와 내 욕을 하다가 목이 컬컬하다고 했지. 목이 컬컬하다면? 막걸리. 막걸리집이군. 그럼 그 근처 대폿집을 샅샅이 훑어보면 되겠네.’

이 부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이 부자와 한양감사는 흐름한 대폿집 하나를 에워쌌다. 창문에 김이 서려 안을 잘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한 감사의 감 하나만은 알아줘야 했다. 그래서 이때까지 한양을 주름잡는 하늘이 내린 감사직을 맡고 있지 않는가? 연봉이 무려 몇 억이다!

“누가 자꾸 안을 들여다보는 뎁쇼.”

주인장이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시는 분이면 들어오랄까요?”

나는 주인장의 말에 휙 고개를 돌려보았다.

돼지코를 창문에 처박고 벌름거리는 것이 틀림없는 부자 코였다.

나는 좀 꺼림칙했지만 허 선비는 오는 사람은 막는 게 아니라면서,

“들어오라고 거래요.”

하고 말하자, 주인장이,

“들어오시래요.”

하고, 말을 받아 전했다.

이 부자와 한 감사는 허 선비를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초대 손님이 되고 말았다.

‘음. 녀석이 홍길동이군.’

이 부자와 한 감사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틀림없어. 비록 도포도 갓도 쓰지 않고 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한 감사의 그 감이 발동했다.

“나 허 선비라고 하오.”

허 선비가 먼저 신분을 밝히며,

“그래, 날 찾아 오셨소?”

하고 말했다.

곤란하게 된 것은 이 부자와 한 감사였다. 그들은 얼굴이 발개지며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예. 저, 관에서 나왔습니다만.”

하고 위엄을 부렸다.

“예? 관이라고요? 그럼 시체?”

놀란 주인장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원, 주인장 농담도. 자, 여기 막걸리라 몇 되 더 갖다 주시오.”

하고 허 선비가 말했다.

“저, 허 선비. 요즘은 되니, 말이니 하는 옛말은 못 쓰고, 그 대신 한 병이니, 천 씨씨니 달라고 말해야 되는데요.”

“젠장, 빌어먹을. 옛것은 다 나쁘구먼!”

허 선비가 조금 흥분하며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이건 덤입니다요.”

하며 주인장이 삶은 두부를 내어왔다.

“와, 맛있겠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두부란 말이냐.”

하고 말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두부를 나무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삼켰다. 그럴 때는 마치 허 선비가 어린 아이 같았다.

“저, 조사할 것이 좀 있는데요?”

한양감사가 서두르듯 말했다.

그러나 허 선비는 이미 막걸리와 오랜만에 먹어보는 두부 맛에 취해 있었다.

“이야기는 나에게 하시오?”

나는 그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래, 뭘 조사하겠다는 말이오?”

“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율도국을 세운 죄요.”

조사권도 없는 이 부자가 마치 감사처럼 말했다.

“그건 길동이가 세운 게지. 내가 세운 게 아니야.”

허 선비는 취해 있었다. 그래도 선비는 완전히 취하는 법이 없다.

‘길동이라면, 음, 바로 이 자를 말하는군.’

이 부자와 한양감사가 동시에 나를 째려보았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성함은 모르겠고, 이름은 길동이요.”

“그럼 성은 당연히 홍 씨겠네요?”

“당근.”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 ‘당근’이란 말은 대답하기 귀찮을 때는 상당히 편한 말이었다.

“그럼 같이 좀 가셔야 되겠는데요?”

이번에는 한양감사가 말했다. 한 감사는 술을 좋아하는지 아까부터 막걸리를 바라보며 딱 한 잔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가기는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한양감영이옵죠.”

한양감사가 말했다.

“우리가 거기를 왜가? 좀 있다 집으로 가야지. 자자, 우선, 술이나 한 잔 받으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감사 앞에 잔을 턱 놓고 막걸리가 철철 넘치게 한 잔 따라주었다. 그러자 감사는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막걸리를 입에 철철 넘치도록 꿀떡꿀떡 삼켰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태어나서 당신처럼 맛있게 막걸리를 마시는 양반은 처음 보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허 선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 바람에 모두가,

“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지만, 이 부자와 한양감사는 금방 조용해졌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래 어느 친일파가 자기 나라나 다름없는 일본에 떡하니 율도국을 세운다면 좋아하겠소?”

이제 긴장이 풀린 한양감사가 말을 풀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이 부자가 한 감사의 옆구리를 나무젓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그 바람에 한양감사는 아프다는 비명도 못 지르고 얼굴만 콱 찡그렸다.

“율도국이 동해 쪽 어느 섬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르오. 왜 왜놈들은 그렇게 영토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오는지, 내 참. 선비다운 데라고는 없으니.”

내가 그렇게 말하자 허 선비가 우스운지 헛기침을 했다.

나는 이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이 부자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으나 그는 막걸리는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뭘 드시나?”

“와인.”

“포도주말입니다.”

나는 와인을 못 알아듣는 허 선비에게 말해주었다.

“음-. 포도주. 과실주라면 몸에 다 좋지.”

“이제 한양감영으로 갈 시간입니다.”

“이 사람아. 술은 시간 정해 놓고 마시는 게 아니야! 가더라도 집으로 갈 시간이지 왜 이 추운데 감영으로 간단 말이야!”

나는 한양감사에게 딱, 큰 소리를 쳤다.

그 바람에 한 감사와 이 부자가 놀라 어깨를 주춤했다.

“당신들 체포 영장 가져 왔어? 하기야 율도국 세웠다고 영장 나올 리도 없지만.”

“영장?”

이번에는 한양감사 못 알아들어 그걸 이 부자가 설명하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다.

“무어라? 그래 술만 처먹고 그냥 빈손으로 왔단 말이냐!”

친일파는 노발대발하며 한양감사와 이 부자를 나무랐다.

“예. 그게 워낙 귀신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서요.”

한양감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말했다.

“아니, 뭐야. 그 놈이 홍길동이라도 되느냐? 아, 참. 홍길동을 잡아오랬지.”

친일파가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래, 허균과 같이 있더란 말이지?”

진정하기 시작한 친일파가 물었다.

“예. 거나하게 막걸리 판에서 취해 둘이 율도국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요.”

“율도국의 위치는 알아냈느냐?”

“아직 잘 모릅니다.”

“에라, 이 놈들아.”

하며 친일파는 이 부자와 한양감사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그래, 허균과 홍길동이도 못 잡아와, 율도국 위치도 몰라, 내 참.”

친일파가 한심하다는 투로 연신 혀를 찼다.

사실 이 친일파라는 작자가 한심하기는 이 부자나 한 감사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것이다.

‘그 놈 들이 율도국의 위치를 모를 리 없다. 특히 허균은 모든 것을 머릿속에 그리며 홍길동을 썼을 것이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일본 쪽 바다 끝이라? 끝이라면? 유구왕국(오키나와)? 그래, 유구왕국이 아닐까!’

그때 친일파는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유구왕국이 율도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유구왕국에는 누가 있나?”

허 선비가 홍길동에게 물었다.

“활빈당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상향 율도국을 세웠지만 왜놈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친일파에게 이 정보가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하게. 그리고 원래 유구왕국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원주민들은 원래 조선에 조공을 하며 기대어 살던 사람들이라 율도국을 세우는데 적극 찬성이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뒤를 이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은 에도(동경)에 막부를 차리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친일파가 율도국 정보를 넘겨준다면-.”

허균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녀석들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미련도 떨치지 않는 집요한 놈들이니 각별히 조심하게!”

“예. 그래서 활빈당은 하루라도 빨리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음-.”

여기서 허균은 고민에 빠졌다.

“저네를 보내면 누가 나를 지키지? 나를 모함하는 놈들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지랄하는 모양인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둔갑술을 좀 쓰는데다, 구름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으니, 율도국에서 한양까지 반나절이면 올 수 있습니다.”

“그거 내가 가르친 재주 아닌가?”

허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앞에 앉아 있던 홍길동이 짚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로 바뀌고 말았다. 순간 허 선비가 정신이 버쩍 드는가 싶더니,

“자, 이제 그만 가세, 더 취하기 전에. 밤이 깊었어.”

하고 말했다.

“당신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난 하루 종일 김치 담근다고 힘들어 죽겠는데.”

아내는 아직 기침을 콜록거리고 있었다.

“음. 허균을 좀 만난다고.”

“허균이 누구야?”

“음. 글 쓰는 사람 하나 있어.”

“맨 날 돈도 안 되는 사람들 만나 뭘 해.”

“이 사람아. 돈만으로 인생이 다 안 된다는 건 알지. 내가 이야기를 또 해줄까?”

“아니!”

그 말에 아내가 다시 기침을 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나섰다.

‘길동이는 태풍을 만나지 않았다면 구름을 타고 율도국에 잘 갔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살린다는 활빈당, 이름 하나 참 잘 지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하여간 허 선비 글재주는 알아줘야지. 그러나저러나 이제는 내가 그 이 부자와 한 감사를 다 막아야 되니.’

나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분명 그들만이 아닐 텐데, 그들 뒤에는 누가 있을까? 허 선비가 말한 친일파? 음-, 그래. 그놈들이 노리는 건 분명 율도국일 것이다. 어떻게든 허 선비를 잡아 율도국의 위치를 알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면 길동이 대신에 내가 나서서 허 선비를 지켜야 한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토쿠가와 막부에 연락해라. 율도국은 바로 유구왕국이라고. 아냐, 아냐.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야겠군.”

친일파가 말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이 부자가 마치 형사처럼 대꾸했다.

“친일파의 감이랄까. 으흠.”

친일파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럼 허균과 홍길동은 잡을 필요가 없네요. 이제 다 알았으니.”

한양감사 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 여 봐, 여 봐, 그들이 세운 나라가 율도국이니 그들이 오야붕 아닌가. 내, 참.”

친일파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토쿠가와의 다이묘(지방 영주)들과 칼잡이들이 유구왕국를 친다는 말이죠.”

한 감사가 좀 흥분하며 말했다.

“이봐, 점잖지 못하게 칼잡이 뭔가. 사무라이이지.”

“아니, 일본말로 하면 괜찮은 말이고 조선말로 하면 쌍말입니까?”

한양감사는 뭔가 친일파에게 불만이 있었다.

“이봐, 자네, 그 감사 자리 그만 두고 싶어!”

친일파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준 자린데, 네가, 감히, 나에게, 괘씸하게, 하는 투로 말했기 때문에 한 감사는 그만 쑥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에도에 막부를 차린 토쿠가와는 유구왕국 정벌을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 선두에 서서 유구왕국에 세웠다는 율도국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율도국의 왕이 누구라고 했지?”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온 친일파가 말했다.

“그리고 그 자를 뒤에서 쓰는 자는 허균이라고 합니다.”

“쓰는 자라니? 왕이 최고지, 조선엔 왕 위에 쓰는 자가 또 있단 말이냐!”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토쿠가와가 바락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친일파는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예. 하여튼 홍길동만 없애주시면, 허균은 제가 조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음, 좋다. 율도국은 3월 초하룻날 친다.”

이 순간 친일파는 머리가 띵해졌다. 3월 초하룻날이면 3월 1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 날은 바로 3·1절 독립운동만세일이 아닌가! 아,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의 깃발이 나부끼던, 자신은 비록 친일파이지만 그 우람한,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었다.

“쇼군(장군). 그 날은 안 됩니다.”

“왜?”

토쿠가와가 실눈을 뜨고 친일파를 바라보았다.

“그 날은 일본이 된통 당하는 날입니다.”

“오이, 너 친일파야, 친한파야?”

토쿠가와는 자신이 부하들 앞에서 멋있게 말한 것 같았지만 뭔가 말이 좀 이상했다.

“친일팝니다.”

“그런데 왜 그날은 안 된다는 거야?”

“유관순과 조선 백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유관순은 누구고, 또 태극기는 뭐야!”

친일파는 토쿠가와에게 그날 싸대기를 맞아 가면서 하루 종일 3·1절에 관해서 설명을 했다.

“음, 이제 알겠다. 그럼 2월 여드레로 하겠다.”

이 말에 친일파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2월 8일은 바로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 친일파가 깨고 보니, 결국 율도국 침공 날짜는 2월 7일로 정해져 있었다.

“율도국이 안전할까?”

허 선비가 말했다.

“글쎄요. 이상향이라서.”

“이상향이라면 전쟁은 없어야 되지 않을까?”

“왜놈들은 전쟁을 좋아하니까요.”

“왜 하필 길동이는 유구왕국에 율도국을 세웠을까?”

“그건 저보다 허 선비가 더 잘 아실 텐데.”

여기서 이야기가 끊겼다. 허 선비는 한참 동안 고민에 쌓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왕권이 약했다. 임금 이름 뒤에, 조나, 종이 붙지 못하고 군이 붙은 것은 연산군과 둘 뿐이었다. 간신들은 임금 알기를 물로 안 것이다. 그러니까 패거리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의 임금들을 독살한 것이다. 그게 나라가 망할 징조였지. 강력한 임금이 나타나 다스려야 한다. 단종을 죽이고 세조를 왕에 세우며 대대로 네 명의 왕을 받든다고 받든 한명회와 간신 패거리들이 사대부랍시고 제 욕심을 채우고자 나라를 말아 먹었으니!

“옥수동에선 한명회가 놀던 압구정이 보이는데.”

나는 막걸리를 사러 늘 달맞이 봉을 넘어 다녔는데 거기서는 한강과 압구정이 잘 보였다. 굽이굽이 치는 한강이 영동대교와 성수대교를 지나면서 중량천과 만나 동호대교 쪽으로 흘러드는 곳이라 경치가 빼어난데, 한강물이 큰 바위가 일품인 응봉산 절벽과 달맞이 봉 아래 쪽에서 강폭이 넓어지면서 뚝섬(서울숲)을 한 바퀴 돌아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이 마당에 유람도 하고 다니는구먼.”

“예. 아닌 게 아니라 한강 유람선도 언젠가 한번 타보기도 했습죠.”

“아니, 그 유람 말고, 막걸리 사는 유람.”

“아, 예 막걸리야 잘 삭은 걸로 이틀에 한 되는 마십니다. 세월도 잊고요.”

“세상 좋구먼.”

“날이 풀리면 그 정자에 가서 한 잔 합시다. 허 선비.”

“말 놓을 땐 놓는구먼.”

“겨우 한 살 차인데. 하하하.”

“내가 옛 선비만 아니라면 말 놓고 지내겠다, 하하하.”

허 선비도 호탕하게 웃었다.

“숭례문(남대문)에 조선과 백성을 구하자는 방을 붙였다면서요. 간도 크시지, 내 참. 뒤에서 치는 놈들을 조심하세요.”

나는 막걸리를 벌컥 들이켰다.

“그래야 지나가는 사람들 다 보지.”

‘그러지 마세요. 제발. 반역죄로 처형당한단 말이에요.’

“나약한 소리!”

허 선비는 마치 내 생각을 아는 듯이 말했다.

“허 선비는 유고, 불교, 도교, 천주교까지 통달하셨더구먼. 게다가 작가라.”

“작가라니, 뭘 짓는 자가 작간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셨잖아요. 이미 명나라에 우리 시와 누님이신 허난설헌 시도 다 소개하시고, 그 이름이 자자하던데요.”

“그럼 뭘 하나?”

“그 허무주의도 도교에서 온 건 가요?”

“하하하.”

허 선비가 크게 웃었다.

“아버지, 누님, 형님들은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을까?”

“서학에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위선과 부패를 타파하지 않으면 나라와 백성을 구하지 못 한다!”

“고리타분한 조정 대신들과 성리학 말씀이군요.”

“게다가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명과 조선을 위협하고 있어.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달라는 판이니.”

‘그 후금이 청나라를 세우고 병자년에 조선을 짓밟으며 쳐들어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이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몇몇 여자들은 화냥년(환향녀)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네 무얼 그리 생각하나?”

“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강한 조국, 문명과 문화와 군사 대국이 되어야죠.”

“음, 문명과 문화라. 그 참 좋은 말이구먼.”

“그런데 율도국 병력으로 한양을 치려하셨어요?”

느닷없는 내 말에 허 선비는 깜짝 놀랐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혹 그렇게 혁명을 이루려 숭례문에 방을 붙이신 것 아닙니까?”

“토쿠가와가 유구왕국을 치지만 않았어도.”

“그럼 지금 홍길동이 위험하다는 것입니까?”

“그는 바람처럼 사는 사나이니까.”

허 선비가 말끝을 흐렸다.

“홍길동과 율도국은 살아 있네. 나와 자네의 가슴 속에, 그리고 백성의 가슴 속에!”

나는 눈에 눈물이 맺히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뭐야! 율도국이 사라졌다고?”

친일파가 격노했다.

“어디, 하늘로? 땅 속으로? 아니면 바다 속으로?”

“예. 그게 토쿠가와가 칼잡이들과 류우큐우(유구, 현재의 오키나와)왕국을 치러 가긴 갔는데 땅은 그대로 남아 있고 홍길동과 율도국이 사라지고 없더란 것입니다.”

이 부자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둔갑술 쓴다는 홍길동이 사라진 것까지야 알아듣겠다만, 율도국이 사라졌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이제 친일파는 안달하기 시작했다.

“예. 제가 설명을 쉽게 하지요. 그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이야기와 같은 말인데, 그러니까 원래 율도국이 유구왕국이고, 유구왕국이 율도국이라는 말입니다.”

한 감사의 말에 친일파는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나려면 한참 있어야겠군. 그러니 마음을 곱게 써야 오래 살지. 내 참 더러워서.”

원해 친일파를 좀 미워하던 한양감사가 말했다.

“그러면 홍길동이 다시 저자거리에 나타나겠구먼.”

이 부자가 쓰러진 친일파 얼굴에 찬 물을 뿌릴까, 말까 생각하며 말했다.

“분명 허균과 만날 거야. 뭔가 다음 계획을 짜지 않겠나?”

“무슨 계획?”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이 부자가 이번에는 옆에 있던 주전자 물을 친일파의 얼굴에 부으며 말했다. 그 바람에 친일파가, 푸하하, 하면서 일어났다.

“내가 자는 줄 알았지? 천만에. 너희들 계획 다 들었어. 어서 가서 허균과 홍길동을 잡아와!”

이번에도 한양감사와 이 부자는 친일파의 말이 뭔가 좀 이상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홍길동이 둘인데요?”

이 부자가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잘 봐. 하나는 분명 짚단일 거야.”

한양감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저히 어느 게 진짜 홍길동이고, 어느 게 짚단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밖에 또 일전에 온 그 사람들이 왔어요. 들어오라 할까요?”

마흔 줄에 들어선 듯한 주인장이 대폿집 미닫이 유리문을 가리키며 허 선비와 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놔두세요.”

홍길동이 말했다.

“자네 둘 중에 누가 진짜 홍길동인가? 내가 쓴 사람을 내가 못 알아보겠네.”

허 선비가 혀를 끌끌, 차며 물었다.

“나는 나고, 홍길동은 홍길동이죠.”

“음. 그것도 그렇군. 그럼 자네가 홍길동이군?”

“나는 나고, 홍길동은 홍길동이죠.”

“뭐야? 이거 참 헷갈려서.”

“그런데 왜 그렇게 기생들은 끼고 놀았어요?”

홍길동이 감히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내가 했다.

“그것 때문에 황해도 도사 시절부터 수안 군수, 공주 목사 때, 그래서 세 번이나 파직 당했지. 그래도 태인에 은거하며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시나 읊고 홍길동전을 쓸 때가 제일 좋았지.”

허 선비는 그 시절이 그리운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래도 참 재주 좋아요. 천추사가 되어 중국까지 다녀왔으니. 은으로 나랏돈 5000냥도 슬쩍 다른 데로 돌리고 말이에요.”

내가 좀 비아냥거리며 넌지시 말해 보았다.

그런데도 허 선비는,

“아, 그거. 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한량은 한량이었다.

황해도 도사 때는 기생과 놀다 파직 당해, 삼척 부사 시절에는 불교를 믿다 탄핵 받아, 영생술과 은둔술을 배운다고 은거해, 영의정 기자헌과 싸워 그를 길주로 유배 보내, 중국에 가서는 가져오지 말라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와, 썩어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고 숭례문에 방을 써 붙여 반역죄로 몰려 마흔아홉에 죽기까지 어찌 보면 해볼 것은 다 해본 그였다.

“그게 다 글 재주 탓이지. 나라에서도 글 솜씨를 믿고 명나라 사신이 오면 나를 종사관으로 내보냈으니.”

“그래, 글은 누구에게 배웠소.”

“유성룡과 이달 선생이지. 유성룡은 잘 알 테고, 이달 선생은 삼당시인 중에 한 분이시지. 비록 서자 출신이지만.”

“음, 그래서 홍길동도 서자 출신으로. 유성룡 선생과 만났다면 이순신도 만났겠네요?”

“어디 이순신뿐이랴. 사명당과도 친하게 지냈지.”

나는 허 선비가 이순신, 사명당도 만났다는 게 신기하고 도무지 믿기질 않았지만,

“허봉은 내 둘째 형인데, 형 친구가 사명당이야.”

하고 허 선비가 말하는 바람에 난 더 신바람이 나서,

“와-.”

하고 감탄하고 말았다.

“그럼, 도술은 사명당에게 배웠다는 것인데.”

“그런 셈이지. 사명당은 조선인 포로를 데리러 왜에 건너갔는데, 왜놈들이 사명당을 죽이려고, 방바닥이 타도록 불을 땠는데도, 이제 죽었지 싶은 사명당이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채, 방이 왜 이리 추워, 하고 나오자 왜놈들이 뒤로 자빠졌으니까.”

“그 이야기는 저도 알아요.”

하고, 내가 나서자, 허 선비는,

“자네가 모르는 게 있나, 나처럼.”

하고 묘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좀 겸연쩍었다.

‘음. 그래서 홍길동이 둔갑술을 쓰는구나.’

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두 홍길동 같은 놈들은 놔두고, 허균을 먼저 잡자.”

한양감사가 이 부자에게 말했다.

“취한 걸 노렸다가, 뒤에서 덮치자는 말이지?”

“그런데 허균이 혼자 갈까?”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이 부자와 한양감사는 밤이 이슥하도록 대폿집 밖 골목길에서 그들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난 그만 집으로 가겠소.”

내가 먼저 허 선비와 홍길동에게 인사를 했다.

난 어지간해서는 밖에서 자지 않는다. 그것보다 밤이 깊었으면 이제 제 집으로 돌아가 자야지. 그게 그냥 단순한 진리다.

“그러시오. 그럼.”

허 선비가 좀 취해 그런지, 홍길동이 대신 인사를 했다.

난 홍길동이 허 선비를 오직 잘 보살피겠냐 싶어, 안심하고 발길을 돌렸다. 취기가 돌아 그런지 입에서는 흥얼흥얼, 노래가 나왔다. 내일은 날이 더 추워지려는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목깃을 타고 들어왔다.

“길동아, 네가 홍길동이고 저 자는 짚단인 모양이구나.”

“허상이지요.”

“네가 나를 지켜주니 든든하다만, 오늘 밤은 어디로 가서 자려느냐?”

“저야 바람처럼 비처럼 구름을 타고 다니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율도국으로 돌아가려는 게냐?”

“예.”

“그럼, 어서 가거라. 내 걱정 말고.”

이게 허 선비와 홍길동의 실수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지만, 홍길동이 구름을 모아 사라진 바로 그때, 허 선비 뒤로 나타난 두 검은 그림자는 몽둥이로 그를 내리쳤다.

“네가 율도국의 군사로 한양을 치려했지!”

친일파가 허균을 문초했다.

“감히 혁명을 꿈꾸다니.”

“꿈꾼 것도 죄냐? 이렇게 사람 잡아놓는 게 죄지.”

허 선비가 두 팔이 꽁꽁 묶인 채 말했다.

“썩어빠진 세상에는 영웅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법.”

“꿈속에 사는군.”

“하기야 친일파에게 나라 말아먹는 꿈 말고 뭐가 있겠나. 하하하.”

바로 그 순간 홍길동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허균은 일본으로 압송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는 홍길동이란 걸출한 인물이 있었던 것도 몰랐을 것이다.

“네 이 놈들! 자신을 팔아먹고 백성을 팔아먹다 못해 나라를 팔아먹을 놈들!”

하며 홍길동은 태껸으로 녀석들을 후려갈겨버렸다.

“녀석들을 어떻게 할까요?”

“포도청으로 보내봐야 금방 풀려나올 탠데.”

허균이 어찌할까, 하고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율도국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하고 홍길동이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법은 따라야지. 그들을 당장 포도청으로 보내게. 그런데 지금 율도국은 어디로 옮겼나?”

“이어도입니다.”

“이어도라면 조선 남쪽 제일 끝에 있다는 전설의 섬 아닌가?”

“예. 그게 바다가 잔잔하면 보이는 섬입니다. 율독국 백성들이 섬에다 나무기둥을 박아 묶어놓고 떠다니는 수상가옥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태풍이 불어도 까딱없습니다.”

“전설의 섬 이어도라."

허균은 언제가 지신도 거기로 돌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

포도청의 포도대장도 친일파와 이 부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높은 한양감사에게는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곧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친일파가 물었다.

“예. 조사만 끝나면.”

“조사는 무슨 조사!”

이 부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엽전 뭉치를 던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그래도 조사가 끝나야 나가지.”

한양감사는 빨리 조사를 끝내라는 투로 점잖게 포도대장에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대우를 받는다곤 하더라도 겨울이 찾아온 포도청 안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 그게 홍길동이라는 자가 워낙 상세히 죄목을 적어오는 바람에.”

포도대장의 입에서 홍길동이라는 말이 나오자 셋은 모두 눈을 찡그리듯 감고 말았다.

“그 자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한양감사 물었다.

“예. 지금 다른 방에서 조사받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제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온 격이 아닌가. 그 놈도 잡아 족치게.”

“그렇지만 사람을 납치한 범인들을 잡아온 자를 어떻게-.”

포도대장이 난처한 표정을 해보였다.

“뭐라? 범인이라니? 이봐, 포도대장. 자네 목이 몇 개가 되나? 이 보게, 자네 식구들은 배곯지 않고 살아야지, 안 그런가? 그러니, 그 놈이 오히려 우리를 강제로 잡았다고 꾸며대면 간단하질 않겠나.”

한양감사의 능수능란한 말에 친일파도 이 부자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리고 셋은 뿌듯하다는 만족감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코와 입술을 히죽거렸다.

그래서, 포도대장이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을 데리고 홍길동이 조사받던 방으로 들어갔지만, 조금 전만 해도 홍길동이 앉아 있던 의자에는 짚단더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친일파와 이 부자, 한 감사는 불과 며칠 만에 풀려 밖으로 나왔다.

“포도청에서 허균을 찾고 있으니 곧 잡힐 거야. 우리는 잠시 손을 빼고 조용히 있는 게 좋아.”

친일파가 밖으로 나오자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예. 어차피 홍길동은 잡을 수 없을 테고.”

한양감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포도청 안에서는 자기만 믿는다고 말하던 친일파의 얼굴이 비굴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어도에 가보시겠어요?”

내가 허 선비에게 말했다.

허 선비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아니, 그렇다면 율도국이 아직 있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있지요. 분명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태풍이 오는 걸 막아주려 더 넓은 바다를 살피고 있지요.”

“그래? 거기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나? 배로 가려면 멀어서 힘이 들 텐데.”

“요즘 홍길동은 안 나타나나요?”

“율도국 건설로 바쁜 모양이야.”

“건설이라뇨?”

“이제는 사람들 싣고 하늘을 나를 기구와 태풍에도 견디는 기지를 만든다나, 뭐래나. 내 참, 자식, 요 몇 해, 영 소식이 뜸한 게-.”

‘음-. 그거구나.’

난 그때 홍길동이 율도국에서 건설하고 있다는 게 무엇이니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 배를 타려면 한강이나 제물포 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제물포까지 갈 거 뭐 있습니까. 한강에서 가면 되죠.”

“그 유람선인가 하는 배로 말인가?”

“아뇨. 날틀로요.”

“날틀이라니?”

“가보시면 압니다.”

그래서 나와 한 선비는 한강 두뭇개 나루터 쪽으로 나갔다.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달맞이 봉과 한강은 언제 보아도 스산하고 장대했다.

“이 사람아. 날틀이라는 배는 왜 아직 아니 오나?”

“서울 숲, 아니, 뚝섬 쪽으로 좀 더 걸어 가셔야지요. 이 한강에는 유람선 말고도 가끔 황포돛배도 떠 있고, 거북선 나루터에는 진짜 거북선도 있었는데, 지금은 남쪽 한산도 앞바다를 지킨다고 진해 해군 본부에서 한강 하구로 해서 끌고 갔지요.”

난 전에 아이들과 함께 동작대교 쪽 거북선 나루터에서 타보았던 거북선을 떠올리며 말했는데,

“아직까지 왜놈들이 설친단 말이지. 에잇, 몹쓸 놈들. 임진왜란 때나, 지금이나. 세종 임금 때 총사령관 이종무가 2만 명의 군사들과 300척의 배로 대마도를 정벌하러 나간 곳이 바로 여기 두뭇개 나루터야. 그때 세종대왕께서 직접 나오셨다더군. 그리고 이 사람아, 해군이 아니라, 수군이겠지.”

하고 허 선비가 말하는 바람에,

“저도 옥수 역 느티나무 나무 아래에서 그 기념비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수군이나 해군이나 똑같지요, 뭐. 하하하.”

하며 웃고 말았다.

“뭐라고? 옥수 역. 그럼 역참은 듣지 못했는데.”

“혹 임금님께 받치던 옥정 우물은 들어보셨지요? 바로 그곳이 지금의 옥수 역 자리입니다.”

내가 허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며 뚝섬에 거의 다 왔을 무렵에, 하늘에서 풀풀, 소리가 나도니 아까 말한 그 날틀이 뚝섬에 내려앉았다.

“아니, 방금 저게 뭔가!”

허 선비가 놀라 뒤로 까무러치며, 말했다.

“헬리콥터입니다.”

“뭐라고? 해리꼽텃새? 저 나는 큰 새가 우리를 해치진 않는가?”

“하하, 새가 아니라 날틀입니다. 바로 우리가 타고 갈.”

그제야 허 선비는 제 정신을 찾고는,

“자네만 믿네.”

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늙은 문인의 손결이 느껴졌다.

“자, 어서 타시죠.”

내가 먼저 날틀에 올라타고 허 선비를 한 손으로 잡아당겼는데, 허 선비는 쓰고 있던 갓이 날아 갈까봐 다른 한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하여간에 우리는 율도국으로 향했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하얀 헬멧과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처음 탈 때부터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난 속으로 갓을 쓴 허 선비의 모습이 우스워 그런가 싶었다. 나는 조종사 바로 옆에 앉았고 허 선비는 뒤에 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가,

“안전띠는 꼭 매십시오.”

하며 안전띠를 매지 않고 뒤에 앉아 있는 허 선비를 보고 말했는데, 아뿔싸, 가슴에 붙은 그의 이름표에 -홍길동-, 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이봐! 자네, 자네, 홍, 길, 동이지!”

내가 그렇게 소리치자, 그가,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예 바로 홍길동입니다.”

하고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뭐라! 자네가 길동이라고?”

허 선비는 어안이 벙벙해 입을 잘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예. 허 선비님. 저 길동입니다. 율도국에서 이걸 타고 날아왔죠.”

“아, 이 사람아! 자네.”

허 선비는 이제는 감격에 겨워서 그런지 눈에 눈물이 맺히려 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구름보다 더 빠르고 안전한 것이 이 날틀이니까요. 다 조선에서 만든 것입니다. 구름 위에서는 바람이 안 불면 율도국까지 한나절이나 걸리지만, 이건 반나절이면 갑니다.”

“하하, 그래? 그 놈 참 신기하다.”

허 선비는 이제야 안정을 찾은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홍길동이 신기하다는 건지, 이 날틀이 신기하다는 건지 난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큰 섬이, 제주도-가 아니고, 탐라국입니다.”

홍길동은 그 동안 몰라보게 말투가 세련되어 있었다.

“오, 탐라국이라. 내가 그 말로만 듣던 탐라국 위를 다 날아보는구먼. 아직 몽고말이 많겠지?”

“물론이옵죠. 제주도, 아니 탐라국이라면 말을 빼고는 이야기 못하죠.”

난 헷갈리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

“저기만 지나면 곧 이어도 율도국입니다.”

“음. 이어도라. 그 전설의 섬이 율도국이 되었다니-.”

허 선비는 날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야말로 푸르고 흰 파도의 물결이 일렁이는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곧 이어도 해양기지였다.

날틀은 탐라국 위를 지나 율도국으로 향했다.

- 끝 - 2007/11/27

이상과 윤동주

이상을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4월 일본의 동경대학이었다.

이상이 1910년 생이니까 이미 그의 나이 일흔 여섯이었다.

그는 기록상으로는 1937년에 이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그가 아직 살아 있다니.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와 같이 가끔 동경대학 안팎을 산책하는 자가 바로 윤동주라는 것이다.

윤동주.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1945년 조국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왜놈들의 생체 실험 대상으로 규슈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다 죽었다. 1917년생이니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그런 그가 살이 있다면 예순 아홉이다.

참 잘 생긴 윤동주의 얼굴은 그가 문학청년임을 말해 주고도 남는다.

그에 비해 이상은 그야말로 소설가답게 생긴 얼굴이다.

반항적인 듯도 하고 괴상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하고.

1986년 4월 일본의 봄은 온통 하얗다.

온 동경 시내를 뒤덮은 그 놈의 하얀 벚꽃 때문에 난 오히려 울긋불긋한 고향의 봄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난 생리적으로 일본과 맞지 않았다.

이상이나 윤동주도 둘 다 불온한 조선인으로 체포되어 죽었으니 그들과 다시 만날 수밖에.

"오랜만일세."

이상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날 안다는 말인가?

"예."

나도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안다는 말인지?"

"책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내가 읽은 이상은 날다 떨어지는 날개와 금동이, 또 아이들이 똥 누는 권태와 청량리까지 전철을 탄 수필입니다."

"선문답할 줄 아나?

"네 조금."

"음. 그럼 요즘 나오기 시작하는 포스트모드니즘은?"

"그런 것도 아세요?"

난 좀 건방지게 말했다.

"언어를 의도적으로 혹사시켰잖아요(그게 이상의 저항이며 독립이었다)."

"어디에서?"

"오감도죠. 13인의 아해. 첫벗째아해도무섭다하오 두번째아해도무섭다하오 세번째아해도무섭다하오 네번째아해도무섭다하오 다섯번째아해도무섭다하오 이렇게 13번째 아해까지 가서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 하오, 라고 썼으니 이게 선문답적 언어 혹사요, 포스트모드니즘이며 쉽게 말해 청바지 째 입고 다니는 것이지요."

"음."

"꽤 알지요?"

"그래."

이상의 얼굴은 좀 화가 난 듯하기도 하고 안 그런 같기도 한 늘 그런 얼굴이었다.

"윤형은 오늘 안 보이네요?"

"윤형이라니?"

"나이도 비슷한데요, 뭐."

“음.”

이상은 또 한방 먹었다는 표정이었다.

실제 이상과 윤동주는 일곱 살 차이였다. 그리고 지금 이상은 어찌되었거나 칠십 대이고 윤형은 육십 대였다.

“동경제국대학은 마음에 드나?”

"전혀."

"음."

"참 윤형은요?"

"어디 가서 또 시나 긁적이고 있겠지."

"음."

이번엔 내가 이상처럼 말했다.

동경제국대학 안에도 벚꽃이 활짝 피었지만 은행나무가 더 많았다. 은행은 동경제국대학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여섯.

나도 소설을 좀 긁적일 때였다.

그러나 여기 일본에 와서는 전혀 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상과 윤동주를 찾아낸 지도 몰랐다.

그러나 까마귀가 너무 많았다.

까마구라, 까마구.

쉬운 글이 좋지 않을까?

까마귀는 동경제국대학 숲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가 좋았다.

- 6첩 방 밖의 남의 나라 - 일본이었다.

그 방 안에서만 윤동주는 조선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을 게다.

윤동주가 죽고 몇 달 후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 그가 죽은 다음에 피운 꽃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시 - 내 이름 석 자 묻힌 무덤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 라는 말은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것일까.

일본은 낭만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나 내 상태도 뭐 그리 낭만적인 아니었지만 하여간에 일본은 더욱 낭만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불과 40년 전의 그 지독한 전체주의 군군주의 국가가 뭐 그리 낭만적이겠는가. 하기야 독일군 장교가 파쇼 낭만주의로 그려지는 세상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바람결에 캠퍼스 안을 걷는 것을 좋아 했다. 사람이 적은 곳이면 더더욱 좋다. 푸른 잔디나 큰 나무들이 살랑거리면 더 좋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으면 좋다.

윤동주는 시인이니까 더 그러했다.

이상이야 나와 비슷할 테고.

오늘은 그들을 만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그들이 쓴 책을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서 꺼내 읽었다. 당시 한국 도서관과는 달리 마음대로 뽑아 볼 수 있는 책들이 많았다.

이상과 윤동주는 둘 다 일본에서 죽었다.

당시 작가를 지망하던 나는 어느새 일본문학을 공부하는 학문의 세계에 발을 잘 못 들여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일본에 반은 적응, 반은 부적응해 나갔다.

그때 조금 공부했던 그것으로 나는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결국 빌빌거리다 조금이나마 먹고 살기 위해 영원한 시간강사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작가는 되었지만 당시의 윤동주나 이상처럼 책은 전혀 팔리지 않고 가난했다.

다시 정리해보자. 이상(1910-1937), 윤동주(1917-1945), 나(1960-?)는 오늘 2006년 11월, 서울에서 이상 96세, 윤동주 89세, 나 46세다.

그때 1986년 일본 동경에서 이상 76세, 윤동주 69세, 나 26세였다.

딱 20년의 차이가 있다.

다시 일본.

‘내가 시인이냐, 학생이냐?’

윤동주는 습작에 빠져들었다.

그때는 인정받지 못한 무명 시인이었지만,

- 그래도 내 이름 석 자 묻힌 무덤 위에는 언젠가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라고 했지.

이상은 나보다 일곱 살 많다고 뻐기지만, 사람이 단순해서 그렇다고 봐야지.

‘난 그게 부럽다.’

윤동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형, 이형, 하고 부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텐데.’

윤동주는 피식 웃었다.

그 새로 등장한 나, 라는 놈은 시건방지기 끝 간 데를 모르고, 살짝살짝 반말도 섞어가면서 대드는 것이, 이건, 한방 쥐어박기도 뭐하고, 참 얄미운 놈이야. 생긴 건 나보다 이상에 더 가까워. 그러니까 소설 나부랭이를 쓴다고 하겠지. 순수한 놈은 아니야. 그럼 시를 썼게?

하여튼 소설 쓰는 놈들은 더러워서 상대할 수가 있어야지.

나중에 나올 시인 박인환, 얼마나 멋지냐!

‘윤동주는 얼굴이 가냘파 보여서 안 돼. 너무 잘 생겨도 탈이라니까.’

이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왜놈들이 조선 땅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아직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지 않는가!

적어도 나처럼 털이라도 까칠하고 명동인가, 종로에서 만난 깡패들과도 한 판 붙을 수 있어야지. 그때 자식들, 웃통 벗은 나를 보고 기가 차니까 그냥 가라고 했지만, 녀석들도 겁이 났던 게지. 그러나 저러나 이 결핵 앓는 기침은 언제 떨어지나? 몸에 살이 붙지 않으니 담배라도 우선 끊어야지.

그 ‘나’라는 놈 참 웃기는 놈이야. 소설도 끌쩍거린다고 하고, 어떻게 보면 웃는 게 나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건방진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래가지고 이 삭막한 일본에 오니 저 생고생이지. 저 건방 받아주는 데는 제 나라뿐이지.

하하.

‘산 나이로 치면, 나 26세나 윤동주 28세나 이상 27세나 서로 윤형, 이형하면 되지 않나? 뭐, 날 보고 한결같이 건방지다고? 건방으로 말하면 이상이 한 수 앞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그때 한국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 앞으로 그를 부를 때, 무조건 윤형, 이형이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어이, 나형?

“내가 읽은 것은 불온서적이 아니다!”

윤동주는 왜놈 형사 이토에게 말했다.

“푸슈킨의 시와 토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의 소설이 불온하다는 말이냐! 그럼 일본에서는 왜 번역을 하였느냐! 너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소설을 썼다는 후타바테이시메이도 읽은 것이다!”

“바가 야로!”

왜놈은 손으로 윤동주를 갈기려다 그래도 멈추어버렸다. 이상하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 책을 다시 조선으로 번역한다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랴?

그러나 왜놈 형사의 육감으로 뭔가 앞으로 일본에 큰일을 저지를 놈만 같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이건 뭐냐!”

이토가 윤동주 앞으로 공책 한나를 툭 던졌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습작 노트였다.

윤동주는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했다.

‘내가 연약한 게지, 이러다간 죽지.’

“십니다.”

“시?”

이토가 공책을 이리저리 살펴봤자 뭘 알아야지.

“왜 조선어로 쓰나?”

이토는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도, 하기야 조선 사람이 조선 글 쓰지 뭘 쓰겠나 싶었지만, 막상 조선에서는 학교나 기차역, 관공서에서는 조선어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앞으로 이딴 거 다시 쓰면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

하고 윤동주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자신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듯한 기운이 감돌아 이토는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이토는,

“칙쇼오.”

하고,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유유히 그림자처럼 아름답게 사라지는 윤동주를 바라보며 욕을 했다.

“윤형, 어디 갔었다고?”

이상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물었다.

“이봐, 윤형. 어디 아파?”

“아니오.”

윤동주는 짧게 말했다.

“왜놈 경찰들이 조사할 게 있다고 해서.”

“개새끼들!”

이상이 이를 갈았다.

“여기는 적국의 수도니까. 하기야 조선도 왜놈이 차지하고 있으니.”

1937년 조선과 일본은 그랬다.

“며칠 전 나도 칸다 헌 책방에 나갔다가 칸다경찰서 앞에서 걸렸지. 수염이 까칠한 채 뭘 생각만하고 있으면 잡아들여 놓고, 불온한 조선인이라나? 똥은 밟지 않는 게 상책이지. 조심하게!”

이상이 윤동주에게 말했다.

하기야 나도 왜놈 순사에게 한번 걸린 적이 있으니 셋 다 한번씩 걸린 셈인데 나보다는 그들이 더 심하게 걸린 것 같았다.

“춥진 않아?”

“왜놈 집 방바닥엔 원래 불씨가 없거든.”

“동경이 서울보다는 따뜻해도 방에 온기가 없으니 옴 몸이 으스스해.”

“글은 쓰고 있는가?”

“여유가 없어. 왜놈들과 일본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그 속에서 글이 잘 될 리 없지.”

“돈도 없고, 나라도 없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박인환 시 하고 똑 같네?”

이상이 말했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이 얼마나 마셨으면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나?”

“하하하.”

나와 윤형은 웃었다.

확실히 입담은 소설가가 더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신이 되려 하는 게군.

“시대와 사람들과 술 때문에 죽었지요.”

박인환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내가 말했다. 그들은 박인환이 죽었을 때는 없었다.

“어이, 나형.”

이상이 나를 불렀다.

사실 난 윤형이 부를 때 보다 이형이 부를 때가 더 겁이 난다.

“왜 그러쇼?”

“아니, 그냥.”

그는 늘 이런 투였다. 사람 불러놓고 맥 빠지게 하는 데는 윤형이나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이상은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왔고,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나와 일본 동지사대학에 유학 중이다. 학벌이나 머리로 보면 아무리 봐도 윤동주가 한 수 위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학벌이나 머리로만 살 수 있는가? 그것으로 걱정 없고 행복하다면 인생은 참 간단한 것이다.

이상은 유학을 온 게 아니라 동양의 파리를 찾아 동경으로 날아든 것이다.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달고 온지 모르지만, 동경은 프랑스가 파리가 아니라, 차디찬 적국의 수도였다. 거기에 이상은 당한 거다.

“뭐야? 윤동주와 이상이 친구라고?”

이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둘 다 이 경찰서에 온 적이 있는 조선놈이란 말이지. 게다가 무식한 놈들은 아니란 말이지. 잘 감시해라!”

왜놈 형사 이토의 책 상 위에는 이상과 윤동주의 행적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또 한 놈은 누구?”

“오이, 나형이라니? 그게 뭐야? 사람 이름이야, 그냥 부르는 말이야?”

이토는 서서히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하여튼 조선말은 어려워.”

하기야 왜놈 가나 문자는 똥 털고 따라 올레야 따라올 수 없는 게 한글이라는 문자지. 그 문자가 50년 뒤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잃어버린 10년’의 일본은 허덕이게 된다. 바로 일본을 10년 동안이나 실의에 빠뜨린 그 유명한 3N인데, 바로 NIHINGO 일본어, NARITA 공항, NTT 일본통신이지.

그걸 이토가 알 리가 있나.

“도망치는 학도병 징집해야지, 아휴, 이 칸다 근처에는 대학이 너무 많아.”

동경제국대학, 메이지대학, 일본대학, 동양대학, 하기야 당시로서는 좀 많았다. 징집 당한 일본 청년들도 대게 남태평양으로 끌려 나가 죽었다.

‘그래, 나이가 스무 여섯, 일곱이라, 이 놈들에게 징집영장을-.’

이토는 머리 하나는 빨리 돌았다.

나는 이미 병역을 마쳤지만 왜놈들이 병력이 모자라니, 언제 다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이 참전했다지만 왜놈들은 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터라 조선에서도 몇 백만이나 되는 학도병과 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여자들이 끌려오고 있었다.

“그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들 둘은 묵묵부답이었다.

돌아가서 희망이 없는 자는 이상과 나였다. 이상은 제비, 츠루, 69다방이 모두 망했고, 나는 실업자 신세였다.

윤동주는 달랐다. 집안도 괜찮고, 연희전문까지 나왔으니 어디 학교에서 선생질이라도 할 수가 있었다.

아! 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거꾸로 되었으니, 윤동주와 이상은 일본에서 죽고 나는 살아 돌아왔다.

1943년 윤동주가 경도에서 잡히지 않았더라면, 1937년 이상이 동경에서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왜놈 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도 아니고, 단지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잡혀서, 그들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는 생체 실험으로, 이상은 폐가 흔적도 없이 바로 이 동경제국대학 병원에서 죽었다!

내가 밥을 먹던 곳이 동경제국대학 의과대학 바로 옆 식당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맛도 없는 왜놈 밥을 1년 반 먹었다. 그 의과대학 병원에 이상은 폐도 없이 누워 무얼 생각했을까?

동경제국대학 정문에는 춘분과 추분 때도 일장기가 휘날렸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좋군요.”

“그렇군. 이렇게 오래 살아 있으니.”

윤동주와 이상은 모두 건강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적국의 수도 동경에, 거기 그렇게!

“유학 생활은 할만한가?”

이상이 윤동주와 나에게 물었다.

“괴롭소.”

나와 윤동주가 말했다.

“내부의 건강과 자신감을 더 키우도록 하시오. 몸과 마음이 살쪄야 견디지.”

이상도 말라 있으니 견디기 괴로울 것은 뻔했다.

“담배를 끊어야지.”

윤동주만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란 피우면서 다음부터는 달라져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10분 뒤면 똑같은데 뭘 피우오? 그렇게 생각하면 담배는 끊을 수 있소. 그러면 밥이 맛있고, 소주 대신 가끔 맥주나 청주를 마시면 다시 살이 찔 것이오.”

나는 그래서 담배를 끊었지만 이상은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피웠다.

나는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글은 쓰오?”

이번에는 윤동주가 물었다.

“글이 잘 되지 않아.”

나도 그랬다.

“시는 잘 되오, 윤형?”

내가 건방지게 물었다. 문인에게 건방은 윤동주를 빼고 필수다.

“잘 되면 내가 자화상이나 참회록을 썼겠는가?”

그래서 난,

‘아, 손으로, 발로 닦는다는 그 청동 거울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좀 더럽다고도 생각했다.

윤동주는 분명 거울을 자주 보았을 것이고 좀 울었을 것이다.

이상은 아내와 화장품 냄새와 거울을 생각했을 것이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이 왜놈 땅에는 오지 않겠다.’

윤동주는 징집을 피해야 했다. 그는 남의 나라 전쟁에 말려들어 죽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시를 쓰는 무명의 젊은이는 원래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한데다, 조센징을 감시하는 나라 일본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이상이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쉿. 저기 간다.”

경도까지 따라온 왜놈 형사 이토가 순사 하나에게 말했다.

“큰 가방까지 들었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겁니다.”

“거긴 왜?”

“아이고. 내 참. 연락선을 타야 조선의 부산에 가지요.”

“아, 참.”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이토였지만 순사 하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기차에 오르기 전 잡아야겠군.”

이토가 말했다.

윤동주가 경도의 기차 정거장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저 기차만 타면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에 가 닿을 수 있다. 제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잡아라!”

이토와 순사 하나가 윤동주의 팔을 하나씩 낚아챘다. 그 바람에 가방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때 그렇게만 잡히지 않았더라도 윤동주는 조국의 해방을 보았을 것이다. 1945년 2월, 대한제국의 해방을 여섯 달 앞두고 윤동주는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용 식염수 주사를 맞다가 괴로워, 괴로워 마지막에는 무슨 소리를 크게 지르며 숨졌다.

“자넨 그때 잡히지 말고 튀든지, 미리 어디로 도망갔어야지!”

이상이 마치 윤동주를 혼내듯 화를 냈다.

“만 이십 칠년 이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그거 자네 시 참회록 아닌가?”

“읽었나?”

이상도 나도 읽었다.

“윤형. ‘불온서적’을 번역했다고 잡힌 게 아니지?”

“그건 무순 소리야?”

“자네 독립 운동했지?”

“그게 죄냐?”

“시를 써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키고 해방시키려 했다?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그것만이 아니겠지. 여러 동지들을 만났을 거야.”

이상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왜놈 땅에서 조선 사람들끼리 만나는 거야.”

“이렇게 살아 있으니 됐지.”

윤동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눈물이 나려했다.

“왜, 나형도 한국에 돌아가려고?”

“예.”

“약해졌군.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지.”

“세월이 흐르면 강해지겠죠. 다만 부모님 뵐 낯이 없습니다.”

이상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손이 찼다. 나는 또 눈물이 나려했다. 많이 약해진 거다.

“자네 윤봉길 의사 아나?”

“상해 홍구 공원에서 왜놈 대장들에게 폭탄을 던졌지요.”

“처처한 방초가 푸르거든 왕손이랑 손잡고 오라고 했지. 거기에 한번 가보게.”

옆에서 듣고 있던 윤형이 피식 웃었다.

“뭘 웃어, 이 사람아. 자네 시보다는 훨씬 힘 있는데.”

“훨-.”

윤동주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셋은 껄껄 웃고 말았다.

“윤형이 죽고 3년이 더 지나야 시집이 나와요.”

이번에는 내가 아는 척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겠지. 내가 연희전문 다닐 때 출간하려다 못했지.”

그때 출판 했더라도 윤동주는 그렇게 애처로웠을까? 윤동주는 자기가 시인인지도 모르고 죽었다. 다만 예언처럼,

언젠가 내 이름 석자 묻힌 무덤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라고 써두었지.

“이형도 왜놈들 징집은 피해야지?”

“이렇게 기침하는 놈을 누가 끌고 가려고?”

“왜놈들은 못 믿네!”

1937년 3월, 이상은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칸다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제도 이상의 다다미방을 왜놈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저건 뭔가? 이건 뭔가?”

하며 이불과 옷장을 들쑤셔놓았다. 그리고 약도처럼 다다미 3장짜리 방을 그리고 이불이며, 옷장이며. 책이 있는 위치마저 자세히 종이에 그렸다.

그걸 보고 있던 이상은 웃음이 나왔다.

‘자식들, 쫀쫀하기는!’

그러나 그게 왜놈 형사들이 검거하는 방법이었다.

“오이, 오이, 오이!”

자식들은 ‘어이’ 발음이 도무지 안 된다.

이상은 좀 피곤했다. 며칠 전부터는 기침도 심해지고 기력이 없었다. 제발 그냥 가자, 그냥 좀 가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이!”

왜놈 순사 하나가 나왔다.

“왜 수염은 기르고 다니는가?”

“기르고 싶어 기른 게 아니오.”

이상은 정말 지쳐 있었다.

쿨럭, 쿨럭.

이상은 땅바닥에 피를 뱉었다.

“너의 죄명은 불온한 조선인, 불온선인이다.”

왜놈 형사 이토가 말했다.

“그럼 너는 불온한 일본인, 불온왜놈이냐?”

이상이 받아쳤다. 그는 원래 서울 종로에서도 웃통 벗고 깡패와 맞붙은 사람이었다.

“바가 야로!”

이토가 발끈했다.

“칙쇼오(짐승 같은 놈)!”

이상도 왜놈 욕은 잘 알았다.

나는 이상이 일본어로 쓴 시를 동경제국대학 도요도미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그냥 거기 놔 둬.”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는 유학 온 나에게 지난 몇 달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제국의 똥 권위인 줄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알았다.

도요도미도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실 그건 연구지 문학은 아니지. 작가들이 써놓은 글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이류 문학이지.

“자네 요새 이상한 자들과 어울려 다닌다지?”

이토 형사가 여기까지 손이 미친 게다.

“누구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대담하게 나가고 싶었으나, 바보처럼 도요도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아직 몸과 마음을 더 움직여 닦아야 한다.

“이게 그 자가 쓴 신가?”

아, 아무래도 잘못 준 것 같았다. 왜 나는 사서 쓸데없는 짓을 한 겔까? 소외되지 않기 위해 도요도미에게 날 알리려고? 그래, 그거다. 윤동주는 시로, 이상은 일부러 오감도 같은 이상한 말들만 써서 왜놈들과 싸우고 있는데

한심한 놈! 못난 놈!

도요도미는 어차피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상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제발 그렇게라도 넘어가주었으면.

이상은 결국 그날로 칸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기침과 각혈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저러다가 죽을 것 같은데요?”

순사 하나가 이토에게 말했다.

“죽으면 골치 아픈데? 가서 의사 불러와!”

이토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렁그렁, 이상은 숨이 가빴다.

‘제기랄, 하필 이런 곳에서.’

더럽고 음습한 유치장에 햇빛이 들 리 없었다.

‘햇볕과 소고기 두 근이면 나을 텐데.’

이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아니 폐가 흔적도 없는 사람을 유치장에 넣어두다니! 당신 정신이 있는 사람이오?”

의사 다카하시는 이토에게 소리쳤다.

이상이 옮겨간 곳이 바로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이었다. 나도 거기서 신체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여전히 생체실험장 냄새가 가시지 않은 곳이었다.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우중충한 벽돌에 둘러싸인 병원 안팎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 쓸쓸한 곳에서 이상은 혼자 죽어 가고 있었다.

“어제(1937년 4월 16일), 이상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네.”

윤동주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말했다.

“가서 이야기해야 되지 않을까?”

“지금 새벽 1신데.”

나도 꽤 취해 있었다.

“하여튼 갑시다.”

밖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너희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지금 몇 신데 면회라니?”

왜놈 수위는 아예 반말로 우리를 쫓아냈다.

그 때에도 이상은 홀로 죽어 가고 있었다.

꼬박꼬박 조는 왜놈 수위를 따돌리고 우리가 병실에 들어선 것은 새벽 4시가 지나서였다.

“간호원, 저기 병실이 왜 비었어!”

내가 이상이 있던 병실을 가리키며 간호원을 다그쳤다.

그제야 내 말에 놀란 간호원이,

“아? 아까, 그 환자는 죽었는데, 지하 영안실에 가보세요.”

< 이상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사망 >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했습니다.”

의사 다카하시가 이상의 마지막 말을 전해주었다.

칸다 경찰서에 불온선인으로 잡힌 지 한 달 만에 이상은 죽었다.

“이상 아내에게 연락해야겠지?”

윤동주가 말했다.

새벽인데도 동은 트지 않았다.

길고 긴 어둠만 가슴을 조여 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이상의 아내 변동림이 와, 이상을 화장했고 그 뼈를 가지고 1937년 5월 4일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9일에 폐결핵으로 죽은 김유정과 합동 영결식을 했고, 이상은 6월 10일 미아리에 묻혔지만 무덤은 유실되었다.

<끝>

2006년 11월 27일. 서울.

도스토예프스키

인생의 행운은 불시에 찾아온다고, 톨스토이는 말했지. 그러면 노력하지 않고 마냥 기다려도 된다는 말처럼 들릴 텐데? 그러다 톨스토이처럼 80세의 방랑 끝에 역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는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도 행운은 뜻밖에 찾아온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랑과 종교, 다자이오사무는 사랑과 혁명이었지.

솔직히 말하자. 그는 일본 문학을 전공했고 다자이오사무의 소설을 연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는 조금 안다.

그가 왜 하필 왜놈들의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는지는 여기에서 다 말하지 않겠다. 단지 친일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그가 처음 다자이오사무의 얼굴을 문학책에서 보았을 때는 한 마디로 무슨 말대가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도 이상야릇했다. 비쩍 마른 큰 키의 후리후리한 몸과 머리를 뒤로 넘긴 어떻게 보면 지성적이라 할 수 있는 긴 얼굴.

반대로 그는 키다 작다. 얼굴도 긴 편이 아니다. 머리카락도 다자이가 곧은데 그의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다. 같은 점이라고는 둘 다 일하는 여자의 손에 키워졌다는 것. 둘 다 문학을 한다는 것. 염세주의자라는 점.

다자이는 1909년에 태어나 1948년에 죽었고, 그는 1960년에 태어나 올해가 2006년이니 나이가 마흔 여섯이다. 그러니까 다자이가 일본에서 그와 마주칠 확률은 없었다.

“형편없는 놈이야.”

다자이가 도스(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말했다.

“날 연구한다는 놈이 오히려 날 까기나 하니.”

다자이는 바짝 화가 나 있었다.

“그 놈은 날 좋아하지.”

도스가 말했다.

“형님은 좋겠소.”

다자이보다 도스는 50년은 더 선배다.

“도대체 나이를 알 수 없는 건 톨스토이야. 머리나 좀 제대로 빗지, 수염과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져 있으니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은 러시아 사람인데.”

다자이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넌 너희 나라 소설가 나이 전부 다 아냐?”

도스가 다자이를 쏘아붙였다.

“난 아무리 봐도 키 작은 곱슬머리가 우성인 것 같아.”

키 크고 마른 다자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형님 생각이고.”

“키가 크든 작든, 머리가 굽실거리든, 안 거리든, 사람을 먼저 봐야지.”

키는 보통이고, 머리카락도 완전한 곱슬머리라고는 할 수 없는 톨스토이가 드디어 나타났다.

인생에 지치긴 세 사람 다 마찬가지지만, 톨스토이는 그게 얼굴에 나타났고, 다자이는 일본인답게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도스는 도박에 빠져 별 표시가 안 났다.

그러나 실제 가장 고뇌에 찬 인생을 그린 건 도스토예프스키였으며, 그 다음이 톨스토이, 다자이는 뭔가 광대적인 데가 있었다.

그런데 다자이는 다섯 번의 자살 끝에 죽었으며, 톨스토이는 철도역에서 객사했고, 도스는 명대로 살다 죽었다.

어릴 때부터 간질병을 앓았던 도스는 죄수로 시베리아에 끌려갔다가 사형 직전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다시 살아나기도 한 인생 그 자체가 유형지인 소설가였다.

다자이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정치에 관심을 둔 완고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 결국 소설가가 되었다.

톨스토이도 가난하지도 않았고, 방탕한 생활 끝에 사랑과 종교를 외친 작가였지만 결국 방랑길에서 죽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를 탓하며 누구의 업적을 간과할 수 없는, 훌륭한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인물은 봐야지.”

톨스토이가 말했다.

“눈빛, 무언가 말해주는 용모, 고귀함, 천박하지 않는 얼굴. 신념과 고뇌에 찬 모습들은 숨길 수가 없지.”

그것은 세 사람이 서로를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작자가 나는 좋아하던가?”

“도스 형님 다음쯤이죠.”

다자이가 톨스토이에게 말했다.

“나와 도스의 차이는 무어라 생각하나?”

“혁명적 정신과 덜 지루하다는 것이겠죠.”

“그럼 도스의 글도 지루하긴 하다는 말이군.”

“제 글보다는 그렇죠.”

사실 다자이의 글은 간결한 호소체로 허구의 명인다운 소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정의를 위해 놀고 있다.

아이들보다 부모가 중요하다.

가정의 행복은 모든 악의 근본이다.

라는 따위였다.

“아는 척 하는 건 여전하군.”

도스가 말했다.

“누가요?”

다자이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긴. 그 자지.”

“그 자가 지금 눈앞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아도 난 알 수 있어.”

하기야 도스는 괴로워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쓰곤 했으니까.

“괴롭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톨스토이가 물었다.

“있지. 더 괴로워하는 사람과 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듯이, 천성이 활발하고 명랑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란 사람들이지.”

도스가 말했다.

“음-.”

톨스토이와 다자이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을 참고 이겨내 승화시키는 길밖에는 없다.”

도스가 단언했다.

“그 자는 슬기로운 척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나약해지지. 좋을 땐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지. 위기가 닥치면 어쩔 줄을 모르고. 이게 그 자의 본모습일 거야.”

“어떻게 저보다 더 그 자를 잘 아십니까.”

“그 자가 자네를 연구한 거지, 자네가 그 자를 연구한 건 아니잖아.”

뭔가 좀 이상했지만, 그것도 그렇다 싶어 다자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넨 그 자를 만나본 적이 있나?”

“아뇨. 죠스, 아니 도스 형님은?”

“나도 없네. 한번 만나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지는 않네만.”

도스가 말끝을 묘하게 돌렸다.

“만나서 무얼 하겠어요.”

다자이가 또 특유의 허무주의로 빠져들었다. 다자이는 언제 보아도 도스보다 우울한 인상이었다. 하기야 사형 선고를 받고 시베리아까지 끌려갔다온 도스에게 무슨 우울이니, 허무주의 따위가 있겠는가!

“그는 조선인인가?”

“그렇소.”

아무래도 다자이가 그를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도 한번 가보고 싶군.”

“이제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데요.”

다자이가 말했다. 하기야 다자이는 1948년에 죽었으니 해방된 대한민국을 알 것이다.

또 도스가 한국에 가는 일도 영혼불멸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가 지나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제 도박은 그만두고 오로지 예술만 하자.”

도스가 신념처럼 말했다.

“도박에 빠지는 거나 예술에 빠지는 거나 빠지는 건 똑같죠.”

“‘자기 정화와 행복의 지표는 다르겠지.”

“가난해서 예술을 했나요, 예술을 해서 가난해졌나요?”

다자이도 아까 도스처럼 말해보았다.

“가난하면 예술을 잘 못하지.”

일본 동북부 아오모리현의 대지주의 아들인 다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자이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작자가 있는 한국에 한번 같이 가시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마치 조울증의 초기 증세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도스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다자이가 따져 물었다.

그런데 도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보통 이럴 때면 다자이를 책망할 텐데 오히려 자기가 그 말을 해놓고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다자이가 도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음? 아냐, 아무 것도.”

도스가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다자이의 머리를 스쳤다.

한편, 톨스토이는,

“도스의 집이 어디더라?”

하며 레닌그라드의 차가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다행히 전에 도스가 한번 말하던 전당포를 찾아내고 그 위층 도스의 다락방으로 오르면서 톨스토이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전당포 노파의 섬뜩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똑똑똑.

“아무도 없소?”

톨스토이가 문을 밀어보았지만 문은 삐걱 소리만 날 뿐 열리지는 않았다.

‘이 친구, 설마 어디로 또 요양을 떠난 건 아니겠지.’

톨스토이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낮에 먹다 남은 차갑고 딱딱한 빵을 한 모금 입에 베어 물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나는 왜 방랑을 선택했는가?’

바로 그때였다. 아까까지 아무도 없던 방안에서 분명 보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 이봐, 도스. 나야 톨스토이.”

그러나 톨스토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안에서 나던 소리가 멈추어버렸다.

“녀석이 왜 하필 나한테로 도망쳐왔을까?”

“?”

다자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 작자 말이야. 자네를 연구한다는?”

“그 조선인이 왜요?”

“지금 내 집에 있어.”

그 말에 몸이 약한 다자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망 친 이유가 뭐래요?”

“총독부에 태극기를 꽂았다나?”

조선 총독부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조선 깃발을 달았다, 다자이는 대번에 그렇게 생각했다.

“자네 거기서 뭘 하나?”

도스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잠이든 톨스토이에게 말했다.

“응? 음. 자네를 기다렸지.”

톨스토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행색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 들어가세.”

하면서 문을 땄다.

“자네도 그만 이리 나와.”

도스가 낡은 원탁에 잔을 놓으며 벽장 쪽을 향해 말했다.

그때 벽장문이 스르륵 열리며 웬 동양인 청년 하나가 툭 뛰어내렸다.

“영관김이라는 조선인 작가야.”

도스가 놀라 멀뚱히 서 있는 톨스토이에게 그 작자를 소개했다.

“나 톨스토이요.”

키는 아무래도 도스나 톨스토이가 훨씬 커 보였다.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는데.”

톨스토이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그게 몇 달 전이라지. 그런데도 이 겁 많은 친구가 아직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않으니.”

도스가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러시아 비밀경찰도 의심스럽습니다.”

영관김이 말했다.

“음.”

톨스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톨스토이는 약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자네, 참 멀리도 도망쳐왔군.”

톨스토이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

“예? 아, 예. 왜놈 밀정들이 워낙 기똥차서요.”

여기서 영관김은 러시아어로 이, 기똥차다, 라는 말을 번역하는데 애를 먹어 그냥, 대단히 빨라서요, 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버렸다.

“그래, 일장기 대신 달아 올렸다는 그 태극기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소?”

그 청년이 말한 조선과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은 톨스토이가 말했다.

조선 청년은 열심히 팔괘와 태극 문양을 그렸다.

“음.”

이번에는 말이 없던 도스가 관심을 나타내며,

“빨간 동그라미 하나의 일본 깃발과는 확 다르군.”

하고 말했다.

“자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잖나?”

톨스토이가 태극기를 손에 든 채 말했다.

“예. 돌아가야죠.”

그렇게 말하는 조선인 청년의 모습은 어딘가 비장한데가 있었다.

“그런데 소설을 쓴다고?”

톨스토이가 말했다.

“지금 쓴 거라도 있나?”

“예, 요 몇 달 동안 하도 심심해서 쓴 게 있지만, 한글이라서.”

“-.”

톨스토이가 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저러나 자네 언제 갈 거야?”

도스가 더 이상 같이 있기 지겹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내일 가겠습니다.”

사실 청년도 도스와 같이 있기가 버거웠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결코 같이 살지는 못한다. 그게 남녀이면 말이 좀 달라지지만, 그 경우도 결혼한 사이일 때만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자네는 여기를 어찌 알고 왔는가?”

톨스토이가 물었다.

“러시아라면 소설가 가운데 톨스토이씨보다 도스토예프스키 형님이 먼저 생각나 무작정 이리로 온 것이죠. 상해나 중경보다 안전도 할 테고.”

톨스토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스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예.”

청년의 대답은 간단했다.

“예술성은 무엇인가?”

아직 낯빛이 푸르죽죽한 톨스토이가 물었다.

“화를 푸는 것이죠. 아니 화를 풀어내어 승화하는 수단이죠.”

“음-.”

도스와 톨스토이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일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그 다음은 배로 원산항까지. 내일 떠나겠습니다.”

“돈은 우리가 마련해주겠네.”

도스가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도스 형님의 소설 가운데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보다 백야가 재미있었습니다.”

“그건 단편인데.”

“장편은 지루했습니다.”

“내 소설은 어땠나?”

톨스토이가 이번에는 뭔가 기대하며 물었다.

“예. 이것 , 저것 조금씩은 다 읽어봤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건 없습니다. 단 바보 이반만 이솝이나 오 헨리를 연상시켜요.”

“하하하.”

톨스토이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분노와 무시도 승화되면 문학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 그를 만나지는 못했나요?”

다자이가 도스에게 물었다.

“그건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게 아닌가. 자네를 연구했다고 하니.”

“그는 연구에는 도무지 흥미가 없어요. 오직 소설에만 관심이 있죠.”

“자네도 그를 만나지는 못한 모양이군.”

“아니, 1945년 겨울 동경에서 딱 한번 만났지요.”

“그래, 뭐라 하던가?”

“이제 더 이상 나를 연구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내 소설을 잘 쓴 글이라고 하더군요. 하여튼 건방지기는.”

“그 건방이 소설을 쓰게 하는 게 아닌가, 자네나 나나.”

다자이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칙쇼오.”

하고 말했다.

“톨스토이 씨는 어떻게 되었죠?”

“발 길 닿는 대로 떠다니다 낯선 기차역에서 별빛과 함께 잠들었지.”

도스와 다자이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자이는 194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미 그 전에 죽었다.

비록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었지만, 그들은 시대를 넘나드는 예술을 남겼고, 2007년에는 바로 그 한국인 작가가 이제 마흔 여덟이 되어 그들을 기리는 글을 썼다.

- 끝 - 2007/9/25.

사 랑

“사랑? 그거 웃기는 거지.”

“왜요?”

“결실 없는 사랑이 무슨 사랑이야. 해거리도 아니고.”

“해거리라뇨?”

“나무가 한 해는 열매를 거의 맺지 않는 거.”

남자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뭔가 이 남자는 말이 좀 어눌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도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 열매 맺지 않으면 허무한 사랑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세상에, 세상에, 요새 세상에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한테 아가씨, 라고 부르는 남자도 드물 것이다. 하여튼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안 드는데요.”

여자가 쌀쌀맞게 말했다.

쌀쌀맞다는 것은 냉정하다는 것이고, 그건 여자가 합리적 내지 논리적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말이 어눌한 남자는 판판이 당하게 생겼다.

“왜요?”

남자가 물었다. 사실 여자는 따지고 보면 이런 왜, 라는 질문에 약하다. 따지기보다 제 감정에 녹아드니까. 이게 아까 말하고 반대인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대게 여자는 우선 돈 많고, 마음 좋은 남자를 원한다. 그러니까 마음 좋고 돈 없는 남자는 소용없을 때가 많다. 거기에 키도 커야 하고, 인물도 잘 생기면 금상첨화인데, 여자의 허영심은 남자 못지않다. 그게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특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여자는 아름다운 여자다. 과연 이 여자 주인공이 허영심이 많을까, 아니면 이 여성 작가(필자)가 허영심이 많을까?

몇몇 여자들을 빼고 보통 여자들은 잡것의 번식을 좋아한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치면 잡초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 남자의 몸은 굵다. 말투도 점잖다기보다는 막말에 가깝다. 한 마디로 얼굴도 언행도 곱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자가 이 남자에게 자꾸 끌린다는 것은 다분히 잡초와 관계가 있다. 남자는 아까부터 번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연애니, 사랑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번식을 위한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이름은 연희에요. 아가씨가 아니라.”

여자가 용기를 내어 먼저 말했다.

“하하하.”

남자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그러고도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난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소.”

이 남자의 애인은 필자다. 연희라는 여자는 명랑하고 솔직하다면, 필자는 허영심이 많지만 지성적인 편이다.

“문지기 있다고 공이 안 들어가나요.”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은 동시에 웃고 말았다.

“무뚝뚝해서 좋다는 말이오?”

“그거 말고 뭐 다른 매력이라도 있어요?”

“하하하.”

“호호호.”

남자나 여자나 둘 다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본다고 생각했다.

여자나 남자나 해학적인 데다 건강해보였다. 그런 데서는 사랑이 싹트기 쉽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필자는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지성이야 뭐 그리 방해가 되겠느냐만, 허영이 문제였다. 솔직한 남자는 허영심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는 언제가 비수처럼 말했다.

“지성은 지식이 아니야. 지성은 바른 길을 찾아내는 눈이지. 혜안이라는 거.”

“그럼 나한테는 혜안이 없다는 것이에요?”

지성적인 필자는 쏘아붙였다.

“혜안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솟고 있느냐, 아직 솟지 않았느냐의 차이지.”

“잘 난 척하는 건 여전하네요.”

“헤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그렇군요.”

필자는 헤어지고도 분에 이기지 못했다. 자신의 지성이 내리 깎인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보다 허영과 지성이 애틋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그렇지만 필자가,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 즈음이었다.

“왜 좀 안다는 여자들은 무뚝뚝한 남자를 좋아할까?”

“뭔가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잖아요.”

연희가 말했다. 오늘은 초록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하하하.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것과 있는 것과는 어떤 차이지? 그러다가 카리스마라곤 없는 게 하나, 둘 드러나면 어떡하지? 그냥 차버리나? 하하하.”

“어딘가 자신감이 있어 보여요.”

“연희 말은 언제나, 뭔가 있어 보여요, 이구먼.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성실히 살다보면 자연히 몸에 베이는 것들을 가지고.”

“어머. 완전히 자신에 넘치시네.”

여자가 그저 명랑하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일까? 마음이 바르다면,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을 줄 알아야겠지. 연희는 과연 어느 쪽일까? 형세가 좋을 때 명랑하기란 쉽다. 또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빛마저 속이는 여자도 있을지 모른다. 남자는 눈이 가끔 어두워질 때가 있으니까 그 빈틈을 노리는 여자도 당연히 있을 게다.

“연희는 집에 부모님이 계시나?”

“네. 그런데, 왜 그러시죠?”

남자는 사랑보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부모가 있다면 신원은 사기꾼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많다.

“안제 한번 만나 뵈어야지.”

“어머. 점점. 매력적이야. 만나서 뭐 하시게요?”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해야지.”

“어머머, 미쳐, 내가. 우리가 만난 것도 몇 번 안 되는데.”

“다섯 번이면 많이 만난 거지. 더 이상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나?”

“네? 아니, 결혼하기 위해서 저와 만났단 말이에요?”

“나한테 매력을 느낀 건 연희잖아.”

남자이 이 말에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제가 뭘 잘못 생각했네요. 저 그만 가보겠어요."

“그럼 서른이 된 남녀가 뭐 때문에 만나단 말이야.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남자는 돌아서 가는 연희의 뒷모습조차 바라보지 않았지만, 왠지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지막은 아닐 게야.’

‘참 웃기는 남자야. 자기가 뭐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멋있다, 멋있다, 해주니까, 내 참 기가 차서. 고무신 신은 옛날 여자나 찾아보라지.’

연희는 그렇게 분을 삭이며 바깥 찬 바람을 쐬며 걸어가고 있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않았다.

며칠 뒤, 먼저 전화를 건 쪽은 여자였다.

“아직, 저와 결혼을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남자의 말을 항상 짧았다. 그걸 또 멋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난, 아직.”

“결혼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

남자는 법문처럼 중얼거렸다.

“필자라는 여자와는 완전히 헤어졌나요?”

“내가 사기꾼인 줄 아나?”

남자의 그 이상한 억양에 여자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필자는 요즘 다른 남자와 선을 보고 있다더군.”

무뚝뚝하면서 멋대가리 없고, 욕심 많은 독선적인 남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 반면에 명랑하고, 멋있고, 깔끔한 남자도 많다. 바로 요즘 필자가 선을 보고 만난다는 남자였다.

연희는 안심했다. 뭔가 이 남자에게는 안도감이라는 게 있었다.

여자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생리학적으로 보통 25세 정도가 아이 낳기에는 제일 좋다고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 다섯이 되면 그때는 정말 아이 낳기도 위험한 것이다. 연희는 현대 이기주의의 극치로 아이를 낳지 않고 살 그런 여자는 아니다.

결국 연희는 이 남자와 결혼을 했고, 필자는 그 깔끔한 남자와 결혼했다.

둘 다 그럭저럭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사회공헌도라는 측도와 결혼 생활과의 관계가 있다면, 연희 부부 쪽이 앞선다는 것이다. 깔끔한 필자 부부 쪽은 뭔가 이기적이며 늘 긴장하고 사는데 비해서, 이 연희 부부 쪽은 만사태평이다. 당연히 주식에 투자하고 비싼 차를 굴리는 쪽은 필자 쪽이지만, 연희의 남편은 은행을 도둑놈이라고 생각한다.

가난과 행복과 운을 모두 다 가져갈 수는 없다.

가난한 마음과 행복을 가져가든지, 운과 마음의 가난을 가져가든지 해야 한다.

사랑은 덤이다.

- 끝 -

2007/11/12

금 관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늘돈과 금관은 살찐 돼지처럼 잘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년 뒤면 다 잊혀진다.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결국 한국을 견디어 내지 못했지만, 일본은 더 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은 안전하지만 넓은 세상은 아니라는 것도.

죽어도 고향에서 죽을 수 있는 것보다, 행복했던 곳에서 죽을 행복은 남겨두어야지.

늘돈도 앞으로 10년 뒤면 은행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미 10년 근무했으니까, 다 된 것이다.

그러면 남은 금관은?

열흘 붉은 꽃 없다고 쓰고 싶은데, 꽤 오래 버틴다.

정치 입문 20년, 학교 다닐 때 돌 몇 개 던진 것까지 포함하면 그렇다.

그를 따르는 간신의 무리들이, 항돈 일파를 비롯해서 엉망진창 자동차를 몰며 사회 질서를 유린하고 착한 국민들의 힘을 쏙 빼는 악당들이지.

금권정치, 돈과 권력이 왜 같이 물려 돌아가는 거 있잖아.

제기랄!!

요시다는 그가 20년 뒤 일본과 한국 문화의 분명한 차이를 강의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려 20년간 대학에서 거의 모든 학과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소설도 쓴다고?”

이제 은퇴한 요시다는 그의 제자인 타나카에게 말했다.

“예. 그렇게 유명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바로 이 책입니다.”

타나카는 얼마 전에 한국에 갔을 때 그와 술을 마시며 포장마차 옆에서 토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속이 역겨웠다.

게다가 타나카는 그날 그가 쓴 소설 책 한권을 요시다 교수에게 통역해주어야 했다.

‘요시다는 분명 -적색지대-를 읽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쓴 적국의 심장 동경이니까. 그리고 그걸 혼자만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여 자료를 모으고 집중 토론하고, 대책회의로 결말나는 나라가 일본이니까.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모아 분석하는 나라가 일본이니까. 그 밑바닥에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동양에서는 적어도 일본보다 앞서는 나라가 없어야 된다는 또 다른 열등감과 선비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섬나라 자체의 열등의식이다.

한국인도 키가 작고 팔등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동양인이지만 열등감은 별로 갖지 않는다. 오히려 잘난 척을 너무 해서 탈이다. 이게 바로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다. 그는 바로 이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키가 큰가? 천만에. 몸은 날씬한가? 천만에. 똥배다. 지성은 선비적인가? 그건 그렇다.

돈을 가진 늘돈과 권력을 쥔 금관과 지성적인 그와 각자 제 갈 길을 대로 가며 살면 그뿐이지만 그 길을 올바르고 곧게 나아가야겠지. 돈을 가진 늘돈이 가난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돕고, 금관이 사람을 위한 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적다.

또 그가 요시다나 타나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자기를 더 갈고 닦아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럼 사요나라.

이제 늘돈과 금관만 남았다.

“이거 설 선물입니다만.”

늘돈이 사과 상자를 금관에게 주었다.

“내가 사과 좋아하는 걸 다 아시고.”

금관이 집에 와 사과 상자를 푸니 그 안에는 1억이 들어 있었다. 아파트 짓는 땅 가르쳐준 것뿐인데 1억을 금관에게 주었으니 늘돈은 10억은 벌 것이다.

이제 늘돈과 금관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 그런 애기들은 많이 말해 왔기 때문에 입만 아프다.

그럼 주인공 그만 남았다.

독자들도 짐작이 하겠지만 그는 대학 교수다. 옛날에는 연구도 열심히 했지만 지금은 희망 없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 열정적이다. 요사이 대학은 교수나 학생이나 꿈도 희망도 없고 재미도 없다.

신문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옛날 말이다. <금관의 병졸>들이 더 많을 게다.

그런데 이 <무관의 제왕>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가 한 사람 있다. 독자들도 짐작이 가겠지만 바로 주인공 그다. 여기서 자꾸 주인공 그, 주인공 그, 하고 쓰면 손만 아프니까 앞으로 그를 간단히 주인이라 부르겠다.

그러니까 주인은 대학교수인데, 별로 안 유명한 소설가다. 아니, 주인은 소설가인데, 별로 안 유명한 대학교수다. 이게 나은가?

독자들은 듣기에 어느 게 나은가? 만약 독자들이 상관없다면 주인은 대학교수인데 안 유명한 소설가임에 분명하다.

다시 정리하자.

현재의 등장인물은 독자와 주인과 작가, 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문제는 주인과 작가가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가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와 주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소설가는 글을 잘 쓰니까 독자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글의 초점은 주인과 내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독자들이 판단하기에 달렸다.

더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결국 주인과 독자와 나의 남성 대결이 아닐까?

한 여인이 있다며 여자는 이 세 수컷의 싸움을 즐길 것이다. 셋 가운데 이기는 놈이 튼튼한 놈이라 생각하고 은근슬쩍 무식하게 꼬리를 칠 것이다. 그러면 이 세 남자들은 왜 무지하게 싸워야 하는가? 한 여자에게 자기 씨를 뿌리며 기뻐하기 위해서?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 여자가 만약 여왕벌이라도 되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뭇 여자들 가운데 하나라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아니 그래도 오직 한방을 위해서 청춘과 목숨을 바쳐야 하겠는가?

좋은 건 발랑 까진 여자뿐이다. 세 남자 가운데 한 남자는 조그만 더 생각하면 그래도 더 나은 부 여왕벌이나 여왕개미는 만날 수 있었을 게다. 그래서 나는 이 싸움에서 빠지기로 했다. 남은 건 주인과 독자의 대결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몸이 안 좋다. 어제부터 목이 아프고, 기침을 쿨럭쿨럭 거릴 때마다 기관지가 드럼통 울리는 소리가 난다. 기침이 못되게 기관지를 긁을 때마다 가슴을 움켜쥔다. 코에서는 연신 콧물이 나오는 게 다 이 지랄 같은 자동차와 공장, 공사판 공해 때문이다. 건물마다 문을 꽉꽉 처닫아놓고 피워대는 담배와 제발 하나 바꾸어달라고 해도 안 바꾸어주는 교수실 석유냄새 지독한 난로!

그런 내가 무슨 번식이 생각나겠는가?

여왕벌이 오라 해도 못 간다? 몰라, 로얄제리로 살살 사람 고실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갈 난가? 아니다. 결단코 갈 내가 아니다, 라고 해놓으면 여왕벌은 더 날 뛴다. 이쯤 되면 진정한 수놈의 승자가 누구인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약다고?

승부의 세계에서 이 정도는 약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빛나는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기면 뭐하나?

지금 싸움은 주인과 독자가 하고 있고, 난 한발 물러난 상태다. 아니 처음부터 감기를 핑계로 빠진 것은 아닐까? 지금 주인과 독자가 다투고 있는 여자는 분명 뭇 여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여왕벌이나 부 여왕벌, 여왕개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리석은가? 내가 봐서는 그 여자가 제일 어리석다. 그러니까 여왕벌은 못되었겠지. 아니 여왕개미도 못되었겠지.

주인과 독자의 싸움에서는 독자가 이길 게 뻔하다. 책을 안 사면 그만이니까. 난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주인도 엉뚱한 데가 있으니 싸움은 재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서서히 감기가 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워 이겨 여자를 차지한 운이 좋은 자는 한 동안 날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은 복이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그게 과연 여자뿐일까?

나는 이기지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싶지만 인생에는

그런 것이 있다.

이제 이긴 독자는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바쁘신 독자께서 무슨 할 일이 없다고?”

“원래 바쁘지 않은 게 독자야. 그러니까 한가하게 책을 읽지.”

나는 한방 먹고 말았다.

이제 독자나 주인 이야기도 쓰지 않겠다.

오로지 내 이야기만 쓰겠다.

내가 배운 것은 적을 칠 때는 함부로 치지 말라는 것이다. 사자는 영양 새

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설프게 대강대강 말을 해도 알아들을 줄 알았지만 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를 제거하려 했다. 그것은 그들의 앞길에 내가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늘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골랐 다. 그렇다면 난 늘 무방비였던 셈이다. 적과 적들은 늘 힘을 모아 나를 쳤 다. 그걸 보면 적들은 내가 두려웠던 것이다. 나의 방식은 늘 그들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1.그런데도 내가 그들을 상대하지 않는다면 귀족적인 게 아닐까? 그들은 천 한 자들이고. 그런 핏줄은 타고난 것일 게다. 원래 그렇게 태어나 등 뒤에서 누가 봐주고 있다는 생각. 누구나 자신을 그렇게 봐주고 있다는 생각. 과대망상일까? 착각일까? 만약 아니라면 황족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첫 시조가 수로왕이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싸우지 않고도 이긴다는 것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야 한다. 천성이 남을 괴롭힐 줄 모르고, 반대로 장난삼아 식구들을 괴롭힌다. 등 뒤에서 남을 욕하기보다 똑바로 얼굴을 보며 나무라고 타이른다. 이쯤 되면 적의 혈압은 200을 넘을 것이다.

2.자, 그런데, 이 자가 원래 귀족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황족이 아닌데도 싸움을 피한다. 미천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면 그는 타고난 강자가 아닐까? 몸과 마음이 쇠처럼 단단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3.만약에 이 자가 약자라면 어떤가?

원래, 힘이 없고,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약한 놈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난 이 셋을 모두 갖추고 있다. 얼굴은 미천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귀한 데가 있고, 몸은 단단해 보이면서도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면?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까짓 여자 안 차지하면 될 거 아닌가! 무식한 놈이 단순하고 힘이 세다고, 이런 난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다. 정말 귀찮을 정도다! 이건 경험해본 놈만 아는 이야기다.

이제 내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겠다.

까발릴 대로 다 까발렸다. 뭐 주의하고 눈치보고 할 것도 없다.

그럼 이제 누구 이야기로 이 소설을 엮어가나?

- 끝 - 2007/12/21

역 사

“역사상 제일 사람을 많이 죽인 나쁜 놈은 바로 소련의 스탈린이다. 몇 천만 명을 죽였고, 그는 온갖 민족을 말살했으며, 수만 명의 조선인을 죽음으로 내몬 세계의 죄수다!”

라고 하 선생은 말했다.

“세계 걸작 다큐멘터리를 보면 스탈린 다음으로 모택동, 히틀러도 자기 권력을 다지기 위해 수 천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난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설마, 그렇게 많이?’

하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못된 돈 놈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은 줄어들고 다른 민족과, 종교 사이의 전쟁이 늘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과 철도노조가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파업에 실패했지만 몇 년 전처럼 프랑스 전역을 휩쓴 차량방화 사건이 다시 일어나고 있고, 네덜란드에서는 정부가 수업 시간을 연장했다고 고등학생들이 이틀간 동맹휴업 데모를 했는데, 진압 경찰들이 고등학생들을 강제로 트럭에 태워 연행했고, 미국에서는 상원의원의 말에 반대하는 질문을 했다고 경찰들이 전기 총을 쏘아 대학생을 그 자리에 마비시켜 체포했다.

“이게 2007년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민주적인 일들이다.”

그는 말했다.

“한국은 국회에 여당이 거의 반이나 되는데도 대통령이 탄핵을 받았지만 불과 몇 달 뒤에 헌법재판소라는 제4의 사법기관을 거쳐 다시 살아났다. 제도나 절차로 보면 세계 민주주의 연구 대상감이다. 이 근본은 4·19의거와 1987년 6월 항쟁 때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 선생님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안다. 선진 30개국에서 자살 증가율 1위, 심장병, 뇌졸중 사망률 1위, 교통사고, 출산, 공해, 부동산 투기, 정치인과 공무원과 기업의 부패, 동경을 제친 서울의 물가, 부익부 빈익빈, 교육, 술 문제 많다. 그런데도 밤거리에 나다닐 수 있고, 교통 신호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조국은 부모보다도 중요하다.”

“질문 있습니다.”

용감한 학생이며 내 아들이다.

“나라가 잘못해서 망해도 부모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나라가 없어지면 부모와 자식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이번엔 머리가 굽실한 남학생인데 바로 하 선생의 아들이다.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하 선생님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지만 학생들은 그 뜻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여 선생이 신발을 벗은 채 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어디선가 고린내가 솔솔 풍겨오던 차라, 하 선생이,

“이 보세요. 여기 다른 선생님도 같이 밥을 먹는 교직원 식당에서 어디 발을 올려놓고 밥을 먹는단 말이야.”

나이 어린 여 선생은 당황해서 얼른 발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고 있는 눈치였다.

“말세야 말세.”

하 선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여 선생 이름이 뭐요?”

“이번에 저와 같이 온 한 선생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남 선생이 밥을 한알 한알 입속에서 씹으며 말했다.

“남 선생 전공이 국어라 그랬나?”

“문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 선생과는 뭐 좀 통하는 게 있어.”

“통할 게 뭐 있겠습니까. 어차피 홀로 사는 거죠.”

“하하. 이 사람 봐라. 남 선생은 나이가 몇이오?”

“서른입니다. 선생님은?”

“쉰 살입니다.”

하 선생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하하, 하며 크게 웃고 말았다.

“역사 시간에는 조용합니까?”

“안 조용하면 큰일 나지. 국어 시간에는 좀 시끄럽죠?”

“예. 어느 만큼은 자연스럽게 놔둡니다만.”

“그 조절을 잘 해야 되오.”

“예.”

남 선생은 젊은 사람답게 패기와 열정이 있어 보였다.

‘저게 앞으로 20년은 가야 하는데.’

하 선생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홀로 산다는 것은 불쌍한 것을 불쌍히 여길 줄 안다는 뜻인가, 아니면 동정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둘 다 입니다. 동정하지 않으면서 불쌍히 여기면서도 그것에 자기 속에 숨어 있는 불행과 비운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뭇 사람들은 단순히 눈물을 흘린다.”

“내가 말하는 건.”

“그렇게 너무 칼날처럼 구분 짓지 말게. 그 칼에 자네가 베일 수도 있어. 아니 베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 선생의 이 말에 남 선생의 얼굴은 비통해졌다.

“남 선생이 아직 젊어서 그런 것일 게야. 산전수전 겪다보면.”

“반드시 겪지 않아도.”

“호연지기를 기르고 열심히 공부하며 일하고, 산천을 돌아다녀보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하 선생의 얼굴에는 거친 세상과 세월의 주름이 하나, 둘 흰 머리카락처럼 늘어나 있었다.

“이제 결혼도 슬슬 해야지.”

“저, 사실은 이미 했습니다.”

“오, 그래요.”

바로 그때, 아까 꾸중을 들었던 한 선생이 식판을 들고 일어나가자,

“저런 여자는 누구와 결혼할지 참, 네.”

하고 하 선생이 말했다.

“저, 실은, 제 아내입니다.”

남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요?”

하 선생도 큰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뜻밖에 목소리는 옆 사람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나왔다.

“아니, 그럼, 저 여자, 아, 미안하오, 저 한 선생이 바로 남 선생의 아내라 말이오?”

하 선생은 두 번 세 번 확인하듯이 자꾸 물었다.

“아내가 악처면 남편은 철학자가 된다고 하잖습니까.”

남 선생이 힘없이 말했다.

“남 선생은 철학자가 아니잖소. 국어 선생님이지.”

“문학도 사상이죠.”

남 선생은 그렇게 말하다가,

“아내가 저기서 날 오라 손짓하네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가버렸다.

“당신, 저 사람하고 이야기하지 마!”

아내 한 선생의 첫 마디였다.

나는 속으로 샷업, 하고 영어로 말해주곤 싶었지만,

“음, 나쁜 사람 아니야.”

하고 말해버렸다.

“재수 없는 사람이야. 하여간에 다시 말하지 마! 알았어? 당신!”

앙칼진 아내는 남자를 시들게 한다.

‘당신이 언제 재수 있다고 말한 사림이 있었나? 당신은 나마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남 선생은 잠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저러다 아이는 언제 낳으려고? 다 늙은 다음에?’

둘이 결혼한 지가 2년이 넘었다.

‘너무 일찍 출세한 건 아닐까? 둘 다 사범대학을 나와 운 좋게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니.’

“그건 당신과 내가 노력한 대가야!”

아내는 분명 그렇게 말할 테지만.

그래, 그런 여자가 어디 하나, 둘인가?

그런 사람들 이야기 자꾸 할 것 없다.

나는 나대로 바른 길을 찾아가면 된다.

때론 실수도 할 수 있고, 바르지 못한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바른 길이 아니다, 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그대는 바른 사람이 되어 간다.

하 선생도 벌써 교감이 되었어야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걸었기에 늦어진 것뿐이다. 오만 잔소리 다하고, 오지랖 넓게 이 일 저 일 참견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약지 못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세월이 걸려 한 인물이 태어나고, 한 시대가 사라졌다가 새로운 시대가 다가선다.

내 아들인 아까 그 용감한 학생과, 하 선생의 아들인 머리가 굽실한 학생 앞에도 긴 여정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아직 고등학생이지 않는가. 얼마 동안 다른 사람과 비슷한 인생을 살지도 모르지만, 기상과 기개에 따라 인생의 행복감은 달라질 것이다.

나의 직업과 나이, 외모와 성격은 굳이 독자들에게 밝히지 않겠다. 난 그저 해설자 역할로 충분하다.

하 선생은 역사 선생님이며, 굽실한 머리에 반듯한 얼굴, 곧은 성격인 것만 말해두겠다. 아니 날카로운 독자들은 이미 다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너무 치열하다.

문밖만 나가면 당장 생존경쟁에 뛰어들게 되어버린다.

시동을 걸어둔 오토바이와 차, 경비실 통과, 큰 길에 나서면 달려오는 차들과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하 선생과 같은 선생님이 있는 학교가 있다는 것이 난 자랑스럽다. 하 선생님의 아들처럼 곧은 아들과 용감한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 씩씩해 보인다.

남 선생처럼 문학과 철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도 그의 아내 한 선생 덕분인지 모른다. 한 선생이 아이들을 똑바로만 가르칠 수 있다면 이혼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그러나 한 선생이 바르게 살지 못하고, 아이들도 그렇게 길러갈 때 남 선생은 용감과 이혼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용감하게 나서서 바로잡느냐, 이혼하고 때려치우느냐, 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문학과 철학이 성공해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고 치자. 그럼 그의 아내는 달라질 것인가? 버트란트 러셀은 가설을 세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세워보겠다.

첫째. 아내가 달라졌다고 하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지만, 고뇌 속에 탄생하는 문학과 철학은 어떻게 하나?

둘째. 아내가 안 달라졌다고 하면 남 선생은 불행할 것이지만, 문학과 철학은 속속 태어날 것이다.

셋째. 변수가 있다. 생활의 고뇌보다 사회생활도 남 선생에게 충분한 고뇌를 준다고 할 경우, 그의 아내와 작품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 서술해보시오.

넷째. 일번과 이번에 대해서는 답하지 말 것! (주의: 만약에 답을 쓸 경우 나중에 해설자가 신경질을 냄.)

그럼 지금부터 셋째에 대해서 해설하기로 하겠다.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남 선생의 문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한 선생이라는 아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더해진다면 남 선생은 인간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폭발 직전까지 갈 것이다.

이렇게 이 문제를 풀면 정답으로 친다는 게 해설자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고, 문학 작품이 보잘 것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10년 뒤의 남 선생을 보자.

나이는 마흔이 되었지만,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있던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다행히 아내와는 이혼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생활비는 그녀가 그 학교에서 벌어오고,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었다.

물론 훌륭한 작가도 되지 못했다. 단지 집에서 할 일이 없다보니 소설을 많이 쓸 수 있었지만 원고료를 받은 적은 없다.

그러면 여기서 꺾이고 말 것인가?

다시 10년 뒤의 남 선생을 보자.

나이는 쉰이 되었지만 학교 복직은 못했다. 아내는 여전히 중등학교 선생님이며 교감 자리를 노리고 있지만 쉽지 않다. 다행히 남 선생은 소설이 팔리기 시작하여 책도 몇 권 나왔고 돈도 조금 벌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없는가?

남 선생은 소설을 쓰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문제는 예술이었다.

스스로 예술성을 느끼지 못하는 소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출판사에서 원고를 달라는 부탁이 밀려들어오니 할 수 없이 이것저것 적당히 팔리게 끔만 쓰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만족이 바로 재산이라는데, 그것이 없었다.

차지 않는 예술 혼.

진정한 작가에게 그건 비극적인 것이다.

자, 이제까지 남 선생의 10년 뒤, 20년 뒤를 가정해보았다.

“그러나 남 선생. 작가에게 예술과 생활, 어느 쪽이 중요한가 하는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물음이 아닐까?”

남 선생은 정말 예술이라고도 생활이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남 선생. 과연 위대한 예술이라는 게 있을까? 그 작가가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못했느냐의 차이만 언제나 있는 게 아닐까?”

남 선생은 하 선생의 다음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다하더라도, 그 남들이라는 것도 다 보는 눈이 있고, 보이는 만큼만 보이겠지만, 한 작품을 완성한 작가가 제 스스로 만족하면 그것은 값진 일이다. 그게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면 더 말할 나위없지만.”

“자연은 그 자체가 예술이니까요.”

그때 남 선생이 불쑥 한 마디 던졌다.

“그게 곧 역사가 되겠지.”

하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예술이고, 예술은 곧 역사가 된다.”

- 끝 - 2007/12/11

탐욕과 건망증

그는 다른 사람보다 자유로워 보였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더 시린 고뇌가 있었고,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고 했다.

나는 이 글을 비밀리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뭔가 쑥스러웠다. 그 사람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금방 무얼 잘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길을 잘못 들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 일쑤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나도 요즈음 건망증이 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반드시 건망증이라기보다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빛 때문이 아닐까? 도시와 현대가 내뿜는 빛.”

그가 또 엉뚱한 소릴 했다.

“아냐, 한번에 너무 여러 가지를 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도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불명확성을 잡아채기 위해 나는 벌써 그와 나를 비교해 가며, 관찰하며,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써가면서 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와서는 나도 흔들린다.”

사상과 생각이 굳건해 보이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자, 나는 그의 말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나는 벌써 (나는)이라는 말을 수십 번 되내기며 나를 확인시키고 있는 꼴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상대는 나를 의식하지만 나는 상대를 의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알고 보면 내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여자라면 더 그렇겠지. 그도 부쩍 (때문)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책임을 돌리려는 거야. 그게 오만이라는 거와 연결되지 않을까?

“한번에 한 가지만 생각하고,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나가야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되더군. 마치 내가 전능한 것처럼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보상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피해심리와 강박관념일 거야”

그는 이번에도 추측으로 말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탐욕적인 사람이 아닐까? 탐욕적 인간이 아니라 포용과 탐욕을 함께 갖춘 것이라면.

“나는 빨리 달리고 싶지 않아도 뒤에서 다른 차들이 들이박을 듯이 달려오니까 할 수 없이 달려야 되는 꼴이다. 자신의 뜻을 지키기 어렵다. 여기에서 혼이 빠지게 된다.”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한 고뇌. 그의 번뇌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과연 그것뿐일까? 아니 일단 그렇다고 쳐두자. 나도 운전할 때 그럴 때가 많았다. 심지어 머리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여자지만 욕을 하고, 싸움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많았다. 그래서 요즈음은 뒤로 거울을 보기도 무섭다. 빨간 신호등에 멈추는 차나 멈추지 않는 차가 반반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신호를 지키는 사람도 단속하는 사람도 없어져 간다.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없어진 것일까?

“그걸 자유라 외치고 다니지만, 이기주의자들이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남에 대한 양보와 배려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뜻밖에 열등한 자들이 많다. 신체적, 정신적 열등의식인데, 참고 단련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는 도를 넘은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수에도 정도가 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 맞다하더라도, 그의 건망증과 탐욕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가 욕심이 많기 때문에 일과 걱정이 많을 것이고, 그러니까 무얼 잘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건망증과 탐욕과 우리 사이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는 스물여덟이라고 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키가 커서 그런지 몸은 호리호리했다. 그러면 초등학생이 숙제나 준비물을 잊고 학교에 가져오지 않는 것도 건망증이란 말인가? 탐욕은 분명 아니다. 그는 분명 나에게 관심이 없을까? 아니면 그의 뒤에는 탐욕이 감추어져 있을까? 몇 번 만나지 않아서 말을 턱 놓아버린 것, 어찌 보면 능글맞은 미소, 말문이 막힐 때마다 피우는 담배, 물을 술처럼, 술을 물처럼 들이키는 버릇, 무언가 고독에 찬 듯 땅바닥을 응시하는 눈매. 이 모든 것 뒤에 탐욕이 감추어져 있다면 그건 초등학생이 잊은 준비물과는 다른 것이다.

“요즘 사춘기가 지나 발랑 까진 학생들은 건망증이 있을 거야.”

그는 아까부터 내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똑똑한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이제 겨우 스물여덟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라면 건망증과 탐욕은 분명 무슨 관계가 있다. 그러면 자신이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탐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거 이야기가 묘해지지만, 나도 바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나 나나 탐욕스럽긴 마찬가지다? 마치 건망증이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러면 건망증과 탐욕은 아주 밀접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는 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러는 나는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하기야 관심이 없다면 내가 이 글을 지금 왜 쓰고 있다는 말인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정리하자.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나는 관심이 있다. 아니,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데, 아니, 혹시 그가 나에 대한 관심을 그 탐욕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꾸로 추측을 해보자. 그는 탐욕적이고 나에게 관심이 많지만 건망증과 사회 비판이라는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 나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탐욕 탓이라면 우리는 맺어질 가능성이 낮다. 나는 탐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아까 나의 건망증도 결국 탐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와 맺어질 가능성도 있다? 나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당신도 꽤 거셀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나에게 던진 첫 번째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질문에 나는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그가 나를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건 얼굴이 달아오를 일이 아니라 기분 나쁜 일이 아닌가? 내가 좀 거센 건 사실이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싸울 때는 더 그렇다.

“그건 고집이 세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나는 그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고집이 세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 말을 하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치명타를 맞은 듯 오금이 저려 왔다. 좀 심하게 말하면 꼼짝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 그 사람 앞에서는 새록새록 솟아 난 것이다.

그럼 그는 일부러 그런 말을 나에게 톡톡 던졌다는 말인가?

어떻게, 무슨 재주로, 저런 건방을 떨 수 있다는 말인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 탐욕스럽게 나를 낚아채기 위해서?

나는 급히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가 진정 탐욕스럽다면 나의 이런 모습을 은근히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유유히 바라보곤 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관심이 없는 것일까? 하기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보긴 보는 것 같은데, 희미한 윤곽만 바라보는 듯한 눈매였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여자한테 거셀 것 같다니, 고집이 셀 것 같다는 말을 하는 남자가 정상인가? 정상인지도 모른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비정상인 놈들이 하도 많으니까.

“나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그 사람이 단언했다.

그가 그런 말을 이제 술술 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말일 테니까. 그래서 앞으로 뭔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서로.”

나는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질질 끌지 말고 나와 결혼하려면 빨리 합시다.”

비록 (질질)이라는 말을 썼어도 그는 처음으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질질 끌어봐야 시간만 아깝지. 하기야 돈도.”

사실 이런 데는 찻값이 너무 비싸다. 나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그가 초등학교 선생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나를 다 파악한 것 같은데 나는 그를 아직 잘 모른다는 데 문제점이 있었다.

“불안하오? 젊음은 도전이니까. 안전은 내가 보장하지.”

무슨 안전? 자기가 믿을 만 하다는 말인가?

이 사람은 결혼을 인생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기야 나도 불안에 떨며 결혼을 재고 재다 결국은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가 점점 믿을 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는 보장 못하오.”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학교 선생질을 평생 할지는 장담 못한단 말이오.”

그의 말투가 어느새 많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이게 그의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점점 그에게 흥미진진해져 갔다. 나도 참 한심하지, 어떻게 먹고 살 궁리도 옳게 하지 않으려는 남자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결혼을 생각한다는 말인가?

“학교고 직장 생활이고, 온갖 더러운 꼴, 치사한 꼴 다 참아야 하니.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있어야지.”

그는 불만투성이였다. 그러고도 저런 여유가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윗사람들은 권위가 있나, 멋이 있나. 제대로 된 선생들이 있나, 이건.”

다음 말은 나도 이제 듣지 않아도 안다. 개판이라 이거지.

그렇게 해서 그와 만난 지 세 달 만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세상은 개판이었지만 신혼 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을 맞대는 것도 어색했지만 차츰 익숙해져 갔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지나가면서 나는 아이 둘을 낳았다.

그 사람과 나와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는 결국 선생질을 그만두었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활은 어려워져 갔지만, 내가 보육교사가 되어 조금씩 벌기 시작했고, 때로는 찬 바람이 불어 왔지만 겨울 창가에는 늘 따뜻한 햇살이 모여들었다.

- 끝 -

2007/11/15

우수와 오수

그대 길을 걸었는가?

우수에 젖어?

그대가 밟은 것은 우수인가, 오수인가?

우수는 빗물이 흘러드는 곳이고, 오수는 더러운 물이 흘러드는 곳이다.

그대 오늘 우수를 보았는가, 오수를 보았는가?

그대가 우수에 젖어 있으면 오수가 우수로 보이고, 그대가 분명하면 오수로 보인다.

맨홀 뚜껑 말이다.

오죽하면 오수가 우수로 보였을까?

그나마 오수와 우수를 구분하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이제 이 주인공을 소개하자.

올해 나이는 88세로 노인이다.

현재의 직업은 작가다.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다.

그들은 번화가가 아니면 잘 걷지 않는다.

마주치는 눈길이 피곤해서?

그건 모든 동물이 그렇다.

뜨거운 햇볕 아래 걷고 있는 두 아이와 두 아줌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검은 개는 알게 모르게 꼬리를 흔든다.

오토바이 수리점 시커먼 기름때가 바로 옆 자장면 가게까지 번졌다. 그래도 그 자장면은 맛있을 것이다.

책을 들고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란 줄무늬 와이셔츠를 멋지게 입은 30대 후반의 남자. 책을 좋아하는 소녀.

그들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피곤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후줄근했다.

술을 왜 많이 마셨는가?

후회하지?

그래. 그래. 그래.

바람이 나무숲에 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88세의 작가가 거리를 걷다가 어딘가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는 사람이 길바닥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얼 그리 보시오?"

처음에는 이 중년의 남자가 좀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아, 예, 전 이 뚜껑에 쓰인 게 우수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오수네요."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더 놀란 것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도 분명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우수가 가득한가 보군."

"-."

"그때가 좋은 게지. 글을 쓰겠군."

"그럼 어르신도?"

"우수와 고독은 글을 쓰게 만들지. 나는 우수에 젖진 않아. 메마른 게지."

증년의 작가는 노작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도 글을 쓰나?"

노작가가 말했다.

"글을 쓰고 싶어집니다."

"아직 젊군. 그게 생명력이지."

일렁이는 바람, 출렁대는 가지. 휘몰아치듯 떠도는 구름. 이 모든 것들이 중년의 작가를 있게 만든 것이었다.

거리에는 한낮의 땡볕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비와 바람을 기다리는 겐가?"

"언젠가는 몰아치겠죠."

"태풍을 기다리는 게군."

"점점이 흩어지는 구름이 멋있지 않습니까?"

"오토바이는?"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면 멋있겠죠. 도시에서 시끄러운 놈들 말고."

글이 잘 쓰이지 않을 때도 있다.

무허가의 공백처럼 멍해질 때가 있다.

아무 때고 글이 잘 된다면 그건 인공의 작문이지. 예술적 글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중년의 작가는 그렇게 잠시 빈틈을 메웠다.

"혼자서 무얼 그리 생각하는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지혜는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고 했지."

"요즘도 소설을 쓰십니까?"

"쓰지 않으면 작가도 아니지. 힘차게 살아 있기 위해 글을 쓰는 게지."

노인은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하지 않나?"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중년의 작가를 바라보았다.

"글은 혼자서 쓰는 게지. 아무 곳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고독하게 견디는 그게 예술이지."

예술.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작가가 예술이란 말이 생소하게 들린다면-.

노인은 중년의 작가와 기약 없이 헤어졌다.

'예술적 행위는 원래 혼자 하는 거라.'

노인은 너털웃음이 나왔다.

오해해도 할 수 없고, 이해해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노인은 언젠가 본 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더라?

얼굴도 그렇게 낯설지 않고, 걸음걸이도 눈에 띄었다. 특히 굵은 어깨의 선과 곧은 등이 미끈했다.

'나도 젊어서는 저랬지.'

노작가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와 닮은 데가 참 많아. 얼굴이나 목소리나.'

중년의 작가는 아까 만난 그 노인들 떠올렸다.

'나도 늙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노인은 아직까지 글을 쓴다고 했다. 그게 진정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고뇌하는 자들은 살찐 돼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노작가는 글은 혼자서 쓰는 것이라고 했다.

누구와 타협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라면 이 중년의 작가도 만만하지 않다.

오만이라고 불러도 좋다.

절대 선을 위해서라면 그런 기질도 필요할 때가 있다.

그날도 노인은 산책을 하다가 중년의 작가를 우연히 만났다.

"이 근처에 사시는 모양이구려."

"예."

"예전부터 여기 살았소?"

노인의 말투는 투박했지만 어딘가 다정하게 들렸다.

"예. 한번 이사 온 다음부터는 줄곧-. 어르신은?"

"나도 여기 산 지는 60년이나 되었는데."

"그런데도 이제 처음 뵙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군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참 이상할 정도였다.

서로가 신책을 즐기며 인생을 그린다면, 분명 몇 번 쯤은 만나야 되지 않았을까?

"예술은 이야기하지 않는 법."

"왜요?"

"인생을 참는 것이 곧 예술이니까. 시골, 시장 노인들이나 아주머니들에게도 예술은 있지."

"참고 살아 온 세월이 인생이고 예술이라. 그럼 참지 못한 자들은?"

“망나니지.”

"요즘 쓰고 있는 글이 있나?"

"우수와 오수를 쓰고 있습니다."

중년 작가의 그 말에 노인은 깜짝 놀랐다. 바로 자신이 젊었을 때 쓴 적이 있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홀 뚜껑을 쳐다보고 있었구먼."

"예."

"그 소설 끝이 어떻게 되나?"

노인은 사실 그 소설의 첫머리부터 묻고 싶었다.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

"그럼 대강 어떻게 시작하나?"

노인은 관심을 보였다.

"네. 그게 거리를 걷다가 오수라고 적힌 맨홀을 보고 우수로 보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우수라고 적힌 맨홀 뚜껑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

"거기서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좀 난감했다. 사실 글도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말이지. 자네 고향이 남쪽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성은 로 씨고?"

"예."

"나도 로 씨네."

"그럼 이름은?"

"인이지. 노인."

노인의 말에 더 놀란 것은 중년 작가였다.

"제 이름도 로인입니다."

노인과 로인은 서로가 무척 놀랐다. 그리고 노인은 이 로인이라는 중년의 작가가 바로 자신의 젊었을 때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중년의 작가인 로인은 꿈에도 그런 줄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자신의 젊은 화신을 지금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

그건 경이롭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중년의 로인은 이런 것을 전혀 모른다.

노인에게 왜 이런 일어났을까?

자신의 젊은 모습을 되돌아보라고? 반성하라고?

노인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를 아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딱히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자신의 중년의 모습은 훌륭했다. 생각보다 더 나았다.

"올해 나이가 얼마시오?"

"마흔 여덟입니다."

'마흔 여덟이라. 그때 나는 무얼 했던가.'

노인은 다시 상념에 젖어들었다.

'아니지. 지금 이 사람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네가 바로 나라면 믿겠나?"

"예?"

노인은 로인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년의 작가 로인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속으로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어째서 이름과 고향이 같을 수가 있겠나, 게다가 직업까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자네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살아 계십니다."

"음. 그렇겠지. 앞으로 40년은 더 있어야 돌아가실 테니까."

"?"

"그럼 자네 자식들은 어떻게 되나? 아니 내가 맞추어보지. 아들이 둘이지."

"그거야 뭐."

누구라도 맞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유전자 검사뿐?

그렇다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놓고 아이스크림 막대를 쑤셔 넣어 입안에 가래며 혓바닥에 낀 백태를 긁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노인은,

"자네 머리카락 하나만 주겠나?"

하고 말했다.

"?, 뭐 하시려고요?"

로인은 노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유전자 검사는 99.9999% 같은 핏줄인 것으로 나왔다.

반신반의하던 노인도 이제는 로인이 바로 자신의 화신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걸 로인이 믿을까?

만약에 믿는다면 그는 인생을 달리 살려고 할 지 모른다.

정해진 운명의 순서를 미리 알고 있다면 꽤 따분할 것이다.

"믿지 않겠지만,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의 바로 나요!"

"?"

중년의 작가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했다.

"어르신, 무슨 말씀인지?"

"지난번 머리카락 유전자 조사에서 다 나왔소. 99.9999% 같은 사람이라고."

잠시 뒤, 자초지종을 들은 중년 작가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 설마가 사람 잡은 것이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올 때는 빗물이 다 우수로 빠지나요?"

로인은 말꼬리를 돌리고 말았다.

"아, 아니, 오수로도 빠지겠지."

노인이 가까스로 응답했다.

이야기가 슬슬 이상하게 흘러갔다.

"앞으로 제 인생은 어떻게 되나요? 출세는 하나요?"

"날 보면 모르겠나. 돈과는 거리가 머네."

"네-."

로인은 실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가난한데 그때 가서도 가난하다는 말인가.

"그럼 난 당신과 다르게 살아야겠군요."

"날 부정하는 겐가?"

"출세하지 않으면 다 위선입니다."

"권력이 있어야 설칠 수 있단 말이지?"

"말투가 늘 그러세요?"

그 말에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은 보름동안 햇빛 한번 제대로 나지 않고 잔뜩 찌푸렸다가는 비를 퍼붓기 일쑤였다.

"결국은 자기가 잘 나기 위해서 설친다는 것이죠."

"흔히 정의와 선을 내세우는 무리들은 그렇겠지."

"그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기 일처럼 어질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 그들이 부자건 권력이 있건 가난하건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무슨 소리신지?"

"자네는 정의와 선을 너무 내세우기 때문에 막상 그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의 이기주의와 위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하기야 그 정도도 못하는 졸장부들도 수두룩하지만."

나는 노인의 말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세상에 떳떳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면 비굴해지는 것이다.

"지금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국은 이름을 남기게 될 걸세."

"어르신이 나라면 노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그럼 김인로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

"예?"

김인로, 그가 누구인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끊임없이 소설을 쓴 대작가가 아닌가!

내가 바로 그 김인로가 된다는 말인가?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김인로라는 소설가가 된다는 말인데.

몇 편 읽어본 그의 소설 가운데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궤적, 아니 나의 궤적과 앞으로 쓸 작품이 똑같다면, 나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과연 다르게 살 수나 있는 것일까?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내가 맞춰볼까?"

"아뇨. 됐습니다."

나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군. 긴 말하지 않겠네. 나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나나, 자네를 위해서도. 내가 쓴 글들을 다 읽도록 하게. 그러면 자네는 나와 같은 글을 쓰지 않게 될 걸세."

'바로 그거야! 다 알고 있으면 그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있다!'

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노인은 벌써 돌아서 가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지만 나는 뿌리쳤다.

'오래 건강하십시오!'

구름들 사이로 빗물에 씻긴 하늘이 새파랗게 내비치고 있었다.

- 끝 -.

2007/8/13

손자와 현자

모든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좋은 것도 나쁘게 될 수 있으며, 운이 나쁜 것도 나중에는 좋게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안달하지 말라.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하찮게 지금 그런 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나이는 올해로 100살이다.

사실 나도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이것도 운명인 게지.

앞으로 운명은 어떻게 될까?

지나온 100년이 꿈같은 운명이었듯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내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우선 이름만 밝혀두지.

나이 100살에 산에서 살고, 이름은 도사다.

100살이 되어도 기분이 안 좋은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그런데 이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생 경험으로 봐서는 대게 스스로 못난 행동을 하려고 다짐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특히 아직 살아 있는 나와 동갑인 아내가 잔소리라도 더할 때는 싹 기분이 잡친다.

하기야 100년 동안 내 잔소리도 아내 못지않았을 테니 피장파장인지도 모른다. 우선 뭐든지 좀 참지 않으면 싸우기 쉽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아들 내외는 80동갑이요, 손자 부부는 또 60동갑이다.

이제 나이가 100살이 되고부터는 나도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여, 여기서 증손자들까지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대강 그 숫자만 한 10명 정도 된다. 또 그 사이에 누가, 얼마나 새끼를 친지는 다음에 물어봐야 된다.

"어디서 술 처먹다 종업원들과 싸워 그 큰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아들을 철썩철썩 때려야지!"

아들이 손자에게 말했다. 나는 그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내가 아들은 잘 키웠군. 아니 훌륭하시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유와 예술도 좋지만 사람에게는 이럴 때 이렇게 하는 경우라는 게 있다.

시장 아주머니들에게도 경우가 있고, 사회성이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발랑 까진 놈들이라 해도 어른 앞에서는 고개를 돌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척 하는 것들도 사회성이 있기는 아직 좀 있는 것이다. 그런 게 다 사라져 버리면 결국 하루에 100명이 자살하는 일본 같은 사회가 되고 만다.

100년 전 세상과는 달리 세상 참 더러워졌다.

공기도 더럽고 마음도 치사해졌다. 사내는 기백과 박력이 없고 가시나들은 더 아기똥해졌다. 뭐가 우선인지, 무엇을 나중에 해야 되는지 그들에게는 지혜와 슬기가 없다. 그래서 100살이 된 도사는 현자를 찾았다.

"아범아, 현자를 아느냐?"

나는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손자가 아닐까요?"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손자가 현자라.'

하기야 그 녀석 인물은 어딘가 빛이 났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빛.

그걸 알아본 자 몇이나 될까?

약고 어리석은 무리들은 제 무리들 속에서 싸우니 도무지 그 빛을 알 수가 없다.

세상의 반은 악이며 못된 것들이다.

남자가 여유롭지 못하고 정의를 베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낮은 무리들이다.

여자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면 그것은 이미 여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몇몇 미꾸라지 같은 년놈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런 놈들은 주위에 평화를 주기는커녕 결국 제 수명을 빨리 재촉하게 되어 사고를 잘 당하거나 일찍 죽는다.

"현자여. 세상이 몹시 어지럽다. 사람들이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어찌하면 되겠느냐?"

나는 현자인 손자에게 물어보았다.

"본래의 자연스러운 마음을 대자연 속에서 찾아야지요."

"도시에 자연이 있느냐?"

"찾아보아야지요. 하늘이라도 바라보아야지요. 요즘 사람들은 고개 한번 잘 들지 않는데 그건 제 스스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요?"

"오늘 남북 임시 열차가 문산에서 개성까지, 금강산에서 제진까지 달렸다. 통일이 되어야지."

내가 손자에게 말했다.

"허리를 다쳐 오랫동안 누워만 지내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 다닌다면 그 얼마나 기쁘게겠습니까. 남북한에 끊어진 허리는 빨리 이어야지요."

현자인 손자가 말했다.

"현자야, 비가 내린다. 너는 비가 좋으냐?"

"할아버지는요?"

손자인 현자가 거꾸로 물었다.

"좋지."

"아직 젊으시네요. 100살이라도 젊게 사시는 게지요. 비가 내리기 전에는 답답해도 막상 내리고 나면 시원합니다. 비도 햇살도 나뭇잎도 제가 좋아하는 자연이니까요."

밖에는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다시 퍼붓고 있었다.

다음 날,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다.

나는 아범이 어떻게 손자가 현자인 줄 알았는지 그게 궁금했지만, 제 아들이니 할아비인 나보다 더 잘 아는 거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10년, 그렇다면 110살이다. 아니, 100년을 살고도 모르겠는가, 하루하루를 단지 성실히 살아야 된다는 것을.

“현자야. 길을 걸을 때나, 차를 탈 때 사람들이 괜히 너를 꼴아보지는 않더냐?”

“속인들이야 늘 그렇죠. 그러나 그 가운데는 조용하고 현명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요. 어차피 속세의 무리들이란 덜 떨어진 속물들이 많으니까요.”

“현자도 편하지만은 않는가 보구나.”

"-."

현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현자야, 생각도 없고, 까불기만 하고, 자존심만 센 혼탁한 무리들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조져야 합니다. 고통을 참는 수행을 받아야지요."

현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다시 손자에게 물었다.

"괴로워서 밤에 잠이 안 오는, 깊이 잠들지 못해 자다가도 깨는 젊은이들이 많다는데-."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다가 깨는 건 그 시간에 오줌도 누라는 뜻이니까요."

손자는 그러더니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자도 하루에 한번 나뭇잎이라도 만져보느냐?"

"열두 번도 더 바라보지요."

"하기야 네 아비도 그랬지."

"보통 사람은 햇볕, 구름, 바람, 비가 내리고 안 내리고, 날씨에 따라 기분이 조금씩 달라져 짜증을 내거나 활짝 웃거나 하는데, 늘 한결 같으면 좋은 사람이지."

나도 현자처럼 말해보았다. 100년을 살면서 배운 인생철학이었다.

"할아버지야말로 현자가 아닐까요?"

나는 현자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현자여, 도시의 공해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10년 안에 전기차나 햇빛차만 다니게 하면 됩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밀어붙여야죠."

하기야 나라도 만약 시장이나, 대통령이 된다면, 현자의 생각을 밀어붙이겠다.

남의 잘못만 보려 한다면 자신에게 분노만 쌓일 뿐이다.

현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석가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차분한 마음을 갖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그러면 어지러운 마음을 바로 잡아주겠다."

할아버지가 달마처럼 현자에게 말했다.

"그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하지 않거나, 고생을 겪어보지 않으면 변하기 쉽다."

할아버지가 손자인 현자에게 말했다.

동물도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며 떠들 때가 있다. 가끔 집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악을 쓰는 고양이 소리가 그렇다. 하물며 철없고, 버릇없고, 예의 모르는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리.

"할아버지는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현자가 물었다.

"듣기 싫은 소리, 보기 싫은 것들은 듣고 보지 않는 게 좋다.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사람들 보는 데 서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해야지."

하하하, 할아버지와 현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현자야. 세상을 평정하였느냐?"

"평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평정이냐?"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이지요. 아름답게, 강하게."

"다시 비가 오는구나."

"비가 오기 전에는 답답합니다."

"현자도 그랬느냐?"

"저도 사람이니까요. 할아버지는요?"

"마찬가지지. 다만 좀 더 참을 뿐이지."

나이 60의 젊은 현자는 100세의 할아버지처럼 더 참을성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비가 일찍 개일 듯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까질 수 없을 정도로 까질 대로 다 까졌다."

"여자들이 더 심하더군요."

"좀 더 빠르겠지."

"그럼, 안 까진 자는?"

"순진한 어린이들과 일부 단순한 사람들이지."

"우리의 미래가 그들에게 있는 건가요?"

"그들이 있어 사회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게지."

"현자여, 더 할 말이 있느냐?"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했다.

"없습니다. 도는 어디에도 있고, 또한 없습니다."

"그러면, 너의 할 말도 있고,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늘은 이렇게 선문답으로 하루를 넘겼다.

"젊은이들이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은 어디에 있느냐?"

"어린이들. 싱그러운 나뭇잎, 아리따운 순박한 아가씨들. 사람들. 하늘과 물. 바람결에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그걸 못 보는구나."

"보는 눈이 없는 것이죠. 볼 줄을 모르니 보이는 만큼 보이는 것이지요."

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이 진실입니까? 절망이 진실입니까?"

"둘 다 진실이다."

"현자도 절망할 때가 있느냐?"

"있습니다."

"할아버지는요?"

"100살이 되면 희망도 절망도 같아지지. 절망도 희망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지. 고생할 때는 인생 경험으로 삼아 기가 꺾이지 않도록 할 것! 여유가 있을 때는 양보하고 예의 바르게!"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란 말을 아느냐?"

할아버지가 현자에게 말했다. 도사는 100살이 되었지만 몸과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있지 않고 한가지란 뜻이지요."

손자인 현자는 간단히 대답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하나요?"

"당연하지."

"어떤 게 죄이고 어떤 게 죄가 아닌가요?"

"자기 책임을 다 하지 않았으면 죄, 책임을 다 했으면 죄가 아니지."

현자는 할아버지의 말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도사는 도사군.'

이 할아버지의 성이 도고 이름이 사다.

"지저분한 것들을 보게 되면 마음도 지저분해진다. 질이 낮은 것들은 될 수 있으며 보지 말고 듣지 말고 슬쩍 피하는 게 좋다."

할아버지가 현자인 손자에게 말했다.

"피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조금 일찍 슬쩍 피하도록 하고, 그럴 수 없을 때는 한방 먹여야 한다."

무기력한 날에도 잠시 쉬었다가는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주위에 늘 멋진 자연과 책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책이나 훌륭한 스승이 없으면 자연이 곧 스승이다.

멋진 자연이 없으면 책이 훌륭한 스승인 것이다.

"사람과 동물은 움직여야 한다. 그게 삶이지."

할아버지가 손자인 현자에게 말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비실비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었다.

현자는 거리를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공해가 덜 한 조용한 곳으로.

거리에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들이 있다.

어린 아이들처럼 몰라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남들을 빤히 보면서도, 제 마음에 쓰레기를 버리는 덜 떨어진 놈들이 있다. 그래서 현자는 한 소리했다.

"에끼, 이 놈아!"

그러자 바람 부는 하늘은 먼지가 씻겨 푸르게, 푸르게 맑을 대로 맑아 있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을 보았는가?

시리디 시린 하늘을 보았는가?

차디 찬 맑은 물을 보았는가?

푸르디 루른 나뭇잎을 보았는가?

한들거리는 나무를 보았는가?

아픈 심장을 보았는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할아버지가 현자에게 말했다.

"일도 공부도 모든 것이 수련이라는 말씀이지요."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하늘에 땅에 여름 기운이 가득했다. 집 앞 모과나무도 병이 들고 아프면서도 더욱 자라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을의 결실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며 현자는 빙그레 웃었다.

공기가 탁하다.

시원한 곳, 물과 나무가 푸르게 흐르는 곳이 사람에게 좋다.

어렵게 생활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것을 바라보고, 바라는 사람들은 마음이 푸른 것이다.

도시의 공해에 할아버지도 현자도 조금씩 지쳐 갔다.

아무 기운이 없고 힘이 없는 날이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람 탓이 제일 크다.

잊어버리고 다시 새 일을 될 수 있으면 빨리 시작하라.

집안 정리, 글쓰기, 장을 보러 걸어가기 등.

"말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랜만에 현자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너와 나의 말도 그러하냐?"

"-."

"듣는 사람이 잘 헤아려 듣거나, 아예 듣지 않거나, 오히려 정문일침을 놓아야 한다."

"그럼 말하는 사람은?"

"못된 말하는 년놈은 나쁜 년놈들이니 애초에 사람 취급을 하지 마라."

"사람들이 모두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특히 운전을 해보면 나쁜 년놈들이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리기 때문에 온 데 사고 흔적에, 금방에라도 부딪칠 것 같고, 어린 학생들이나 착한 사람들이 다칠 것 같습니다."

손자인 현자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는 년놈들은 다 미친 년놈의 집안사람들이 많다. 곧 완전히 미쳐 지랄하다 죽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꼿꼿이 앉은 채로 말했다.

"오랜만이다. 현자야."

"손자한테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날이 더워졌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지금 파키스탄이나 인도는 기온이 50도나 되어서 몇 백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정도의 더위는 견디어야지요."

현자인 손자의 말에 100살인 할아버지도 덥다는 소리가 쑥 들어가 버렸다.

악과 못된 년놈은 언제 어디에도 있다.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약한 사람들이 많다.

그대는 못된 놈인가?

강자인가?

약자인가?

진정한 용기 있는 선자인가!

비가 내린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그 보슬비 속을 걸어 달맞이봉을 넘었다.

가을도 아닌데 노랗게 색이 바랜 나뭇잎이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도 아픈 게지."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존주의보라는 현대판 병을 나무도 앓고 있는 것이다. 그 강건한 자연이 앓고 있다면 인간들은 분명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현자인 손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몸에 마음이 뺏기고, 마음에 몸이 뺏기면 정진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현자에게 말했다.

“저는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현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바로잡으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정진할 수 있다.”

현자인 손자는 할아버지야말로 현자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이름이 도사라고만 한다.

“며칠 전에 반성한 것, 배운 것, 깨친 것을 금세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네가 계속 정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자라고 자만하는 걸 아닐까?”

‘자만? 그래 언제부턴가 그게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심하면 낭창과 아기똥과 오만불손과 건방이 된다.’

현자는 한숨을 내쉬려다 할아버지 앞이라 입을 꽉 다물었다.

“싸우지 않고 자신을 굳건히 지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할아버지가 손자인 현자에게 말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말이군요.”

“꼭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렵다.”

할아버지보다 40이나 젊은 현자 나이도 60이다.

“당당하기 위해서는 늘 몸과 마음을 정의롭게 당당하게 수련해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지만 가야할 길이다.

‘우울한 게 아니라 차분해야지.’

우울도 예술적으로 고독하면 멜랑코리 맨이 된다.

‘예술은 결국 잘 견딘다는 게 아닐까? 세월을.’

현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늙는다는 것은 심신이 쇠퇴하는 것이다. 그러니 젊어서도 늙을 수 있고, 늙어서도 젊을 수 있다.’

할아버지는 몸과 마음이 다 젊어 보인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지. 바깥일이나 집안일이나, 공부나 수련이나 똑같다.”

술을 마시기 때문에 요즘 무릎이 아픈 게 아닐까, 현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도 늙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몸과 마음이 있을까?

부처조차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아픈 몸과 마음은 함께 이끌고 살아가다 보면 낫는다.

“나쁜 생각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시궁창에 던져버려라, 보지도 말고.”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한번 하신 것 같은데.”

“으흠.”

할아버지는 계면쩍은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러나 그걸 자꾸 까먹으니 몇 번인들 들으면 어떠랴!

“사람도 나무도 흐트러질 때가 있다.”

할아버지는 또 언젠가 한 말씀을 하려나 보다.

“그러나 곧 다시 제 자리를 찾으면 곧아진다.”

‘나무도 꽃도 흐트러질 때가 있다?’

곧 다시 정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리니 또 들으면 어떠랴.

진정한 담력과 용기가 없거든 거리나 산을 걸어라!

그리고 참아라! 인내하라!

대담하고 쾌활하게 어질게 살라!

- 끝 -

2007/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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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홍길동

지 은 이 : 김영관(소설가)

펴낸 날 : 2008년 1월 25일(2판)

펴낸 곳 : 토 파 민

전화) 02-495-0014 팩스) 02-438-4338

ISBN 978-89-8813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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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율도국의 군사로 한양을 치려했지!”친일파가 허균을 문초했다.

“감히 혁명을 꿈꾸다니.”

“꿈꾼 것도 죄냐? 이렇게 사람 잡아놓는 게 죄지.” -허균과 홍길동-

가난과 행복과 운을 모두 다 가져갈 수는 없다.

가난한 마음과 행복을 가져가든지, 운과 마음의 가난을 가져가든지 해야 한다. 사랑은 덤이다. - 사 랑 -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말이군요.”

“꼭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렵다.”

할아버지보다 40이나 젊은 현자 나이도 60이다. - 손자와 현자 -

허균과 홍길동

(c)김영관. 2008년

값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