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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8

    학꽁치를 파는 기차

                                           김    영 관 (소설가)

  아무 것도 정하지 못했다.

  왜 그걸 스무 살에, 서른 살에 정하지 못했을까?

  마흔 살에는 잘못 정했고, 이제 나이는 쉰에 들어섰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남자는 마흔에는 자리를 잡아야 한다. 쉰은 늦어.”

  나는 지금 그 쉰을 살고 있다.

  힘이 없으면 무엇이나 잘 정하지를 못하지.

  기차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학꽁치포나 쥐포, 아니면 오징어포를 한번 씹어보세요.”

  그가 나 보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 만하다. 그는 셋 가운데 하나라도 나한테 팔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게 가장 맛있나요?”

난 그렇게 물으면서도 학꽁치포를 자꾸 바라보았다.

  “이게 안에는 어떻게 생겼죠?”

  “학꽁치 말린 거예요.”

  그는 낚시할 때 쓰는 밀짚모자 같은 걸 쓰고 있었다.

  “학꽁치와 꽁치는 어떻게 다르죠?”

  내 말에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학꽁치가 훨씬 더 크고 맛이 있죠.”

  “나도 꽁치는 알아요. 그런데 그게 이 작은 봉지 안에 다 들어가나요?”

  “예? 말려서 누른 거니까요.”

  “그래도, 꽁치만 해도 이만한데-.”

  난 그렇게 말하면서 내 두 손을 30센티 자 길이만큼 벌렸다.

  “살 거요, 안 살 거요?”

  “아직 아무 것도 정하지를 못했어요.”

  “어허, 그거 참.”

  그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꾹 참고 있다가, 그냥 벌떡 일어서더니 수레를 끌며,

“심심풀이 땅콩이나 오징어가 있어요.”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난 쥐포와 오징어포는 다 먹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꽁치포나 학꽁치포는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는 게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난 학꽁치란 이름에 뭔가 끌리어 들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꽁치포는 없어서 둘 가운데 먹는다면 학꽁치포를 먹어야 했는데, 오징어포보다도 쥐포가 훨씬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때까지 아무 것도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잠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옆에 남자가 앉아 있는데 잠이 오는지 그것까지야 모르겠지만, 한심한 여자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내가 마지막 열 칸째에 타고 있으니, 그가 다시 오려면 아무리 빨라야 20분은 걸릴 것이다.

  ‘한 컨에 1분씩, 열 칸을 가면 10분, 오는데 10분, 딱 20분이군.’

난 혼자 심심풀이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아니, 그가 화물칸에서 쉬고 온다면? 또 똥이라도 누러 갔다면?’

  그는 30분도 더 지나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가 내 앞으로 수레를 밀고 오고 있었다.

난 가장 밑에 놓인 쥐포와 오징어포와 학꽁치포를 바라보았다.

  ‘사느냐, 마느냐, 산다면 어느 걸 사느냐?’

  “오징어포는 얼마에요?”

  그가 내 옆을 그냥 지나칠 때 난 느닷없이 그렇게 묻고 말았다.

  “3천 원요.”

  ‘이런 제기랄, 터무니없이 비싸기는!’

  난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쥐포는요?”

하고 묻고 말았다.

  “다 똑같아요.”

  난 또 그때 먹지도 않을 학꽁치도 3천원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안 살 거요?”

  그가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는 바람에 난 난데없이,

  “학꽁치 주세요.”

하고 말하고 말았다.

  그건 내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결정이라 나도 속으로는 놀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때 느닷없이 지갑에 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 이거 카드로 되나요?”

하고 수레에서 학꽁치를 막 뺀 그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네?”

  그는 틀림없이 속으로,

  “이 새끼가 지금 장난치나!”

하고 말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난,

“아니, 이것 보세요, 마침 여기 돈이 없잖아요.”

하고 지갑을 옆으로 확 벌렸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만 원짜리가 딱 하나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어? 돈 있네?”

  난 멋쩍어서, 멋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가 무뚝뚝하게 내미는 학꽁치를 받고는,

  ‘이게 맛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거스름돈 7천원을 돌려받았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쥐포 하나 주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설핏 여자의 얼굴을 보았는데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늙어 보였다.

  그런데 여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딱 3천원을 꺼내 그에게 주었고, 그도 비로소,

  “예, 맛있게 드세요.”

하면서 수레를 밀고 내 어깨를 스치며 뒤쪽으로 갔다.

나는 학꽁치포가 들은 비닐 봉투를 짜갰다.

어?

  그런데 그 학꽁치포라는 것이 마치 쥐새끼 가죽 벗겨 말린 것처럼 작아도 너무 작았다. 소금과 설탕과 무슨 기름이 범벅이 되도록 처발라 손에 찍찍했지만, 그것보다도, 어떻게 학꽁치가 그냥 꽁치보다도 더 작을 수 있는지 그게 난 신기했다. 좀 속았다는 생각보다는 이게 혹시 학꽁치 새끼가 아닌가, 그러면 그런 걸 함부로 잡아서는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옆에 여자가 벌써 쥐포를 뜯어먹고 있었으므로, 나도 한 입 입에 물었다.

  어럽쇼, 보기보다 맛은 괜찮았다.

  학꽁치는 딱 다섯 마리 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새끼 학꽁치로. 아니, 그건 꽁치 치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난 학꽁치포와 꽁치포 맛을 알 수 없으며, 또 학꽁치포 한가운데 나 있는 줄은 틀림없이 꽁치 껍데기 색깔인 검은 청색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학꽁치 등 쪽은 푸른 녹색이라고 한다.

  ‘우릴 속인 게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생각보다 맛있는 학꽁치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내가 다시 잠든 까닭은 간밤에 푹 자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축구를 보아서 그랬다기보다는, 조금 마신 술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모기 한두 마리도 있었기는 있었지만, 병든 세파에 휩쓸려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차는 남쪽으로 많이 내려온 것 같았지만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난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창밖 산과 들은 한창 가을을 맞고 있었는데, 쓸쓸한 가을바람이 들녘을 훑고 지나가며 흙먼지를 일으키거나, 눈보라라도 쳐야 나는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학꽁치 탓인가?’

  두세 마리만 먹을 걸, 다섯 마리나 다 먹고 잠든 탓에 속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앉은 여자는 쥐포가 좀 남아 있는 듯, 손에 꽉 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제 때에 내지 못한 세금은 밀리고 있었지만, 다음 달은 가을이 더 깊어질 것이다. 

  ‘다 내가 일자리를 정하지 못한 탓이다.’

  내가 간밤에 그렇게 먹어댄 것도 술을 몇 잔 마시기 위해서였는데, 우스운 일이다. 서로 공을 차 넣으려고 발길질을 해대던 축구는 1대1로 비기고 말았다. 

  ‘정말 책임감이 없었을까?’

  난 참 부지런히 돈을 벌려고 했다.

  기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난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보려 해도 옆에 앉은 여자는 잠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들을 돌리고 앉아 있었으며, 아까 그 장사치는 오지 않았다.

  열 칸짜리 기차에서 그가 한 칸을 지나는데 1분이면 가는데 10분, 오는 데 10분, 화물칸에 앉아 쉰다고 해도,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이 기차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난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난 꿈속에서도 강의실을 찾지 못해 시간이 다 지나도록 헤매는 꿈을 자주 꾸었다.

  ‘원 꿈도!’

  왜 자꾸 그런 꿈을 꾸었던 걸까?

  난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었다. 학생 하나는 들어오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지만, 선생 하나가 들어오지 않으면 학생들은 모두 돌아가야 한다.

  왜?

  왜 그랬을까?

  늘 이 학교 저 학교 쫓기듯 가르쳐서?

  길은 막히고 자동차는 나아가지 않고, 난 경적만 애타게 울려댔다.

  ‘그래, 그런 것들이 쌓였는지도 모르지.’

  옆 여자의 쥐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피나 술을 마셔야 글이 잘된다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

  나는 옆 여자의 얼굴과 떨어진 쥐포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렸다.

  ‘왼손 집게손가락이 저리다는 것은 글자판을 너무 두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럴 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왼손으로 집게손가락을 주물렀다. 또 비어 있는 오른손마저 약손가락 뿌리 쪽이 조금 찌릿찌릿했는데, 이걸 한방에서는 손가락마다 허파인지, 염통인지, 콩팥인지, 지라나 위가 안 좋다는 말을 했지만, 난 어느 게 어느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면 간에 안 좋고, 그건 바로 눈에 나타난다고 했고, 잔글씨가 잘 안 보이는 것은 또 콩팥 탓이라고 했지만, 하여튼 병든 세파 탓에 성을 내지 말 일이다.

  ‘그래도 왜 돈을 안 벌었을까?’

  아니면 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못 벌었다는 말인가?’

  그래.

  나는 나대로 살아야지, 옆의 여자가 쥐포를 먹든, 오징어포를 먹든 난 학꽁치를 먹었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꽁치 치어인지 진짜 학꽁치 새끼인지까지야 잘 몰랐지만, 틀림없이 쥐포나 오징어포는 아니었다.

  내 지갑에는 7천원이 들어 있지만, 카드는 아내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내 이름으로 된 카드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카드를 잘 모르는 어르신들처럼 나도 카드를 잘 모른다. 그리고 귀찮다. 딱딱거리며 거만하게 캐묻는 은행원들의 소리가 싫다.

  ‘하여튼 난 돈을 못 벌지 않았는가?’

  그래, 그렇다, 누가 뭐래도 그렇다.

  그래서 어찌 할 거나?

  이렇게 글이라도 쓰고 있으니 된 거다. 그리고 이게 가장 재미나다.

  난 스무 살에 글을 쓰려고 했지만 서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다가, 마흔이 되어서도 재미나게 쓰지는 못했는데, 이제 쉰이 되고는 재미난 이야기만 쓰기로 정했다.

차창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기차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이 기차는 오디까지 가는 것일까? 그리고 난 왜 기차를 탄 것일까?’

  잠에서 깬 여자는 쥐포가 한 마리도 없는지 봉지를 바닥에 툭 던져버렸다.

  “어디까지 가세요?”

난 여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가다니요? 이 기차는 끝이 없어요.”

  ‘네? 그럴 리가요?’

  난 이 여자가 살짝 돈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 알 수 없는 조바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강의실을 찾을 수 없었던 그 학교에서도, 이 기차 안에서도 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난 나를 찾아 이 기차를 탔을 테지만, 그 기차 안에서도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갑갑했다. 난 다음 역에서는 무조건 내리기고 마음먹었다.

  “다음 역이 어디죠?”

  내 말에 여자는 내가 살짝 돈 놈이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난 꿈을 좇아 이 기차를 탄 것이다.

  강의실에 쫓기지 않기 위해 달아나는 이 기차를 잡아탔는지도 모른다.

  무작정 끝도 없이 떠나는 기차를 집어타고 생전 먹어보지도 못했던 학꽁치를 씹었던 것이다.

  마지막 역이 없다면 7천 원도 필요 없겠지.

  하지만 카드는 아내 것이니 돌려주어야 한다.

  한탄과 탄식.

  내 한숨 소리에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그리고 등을 돌리고 앉은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인가?

  난 밑도 끝도 없는 이 기차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학꽁치와 쥐포와 오징어포를 팔던 그 장사치도 오지 않는다. 아니, 이 기차에 기관사는 있기나 한 것일까? 어떻게 모두들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 저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일까?

  나는 얼굴이라도 한번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몸에서 학꽁치 냄새가 났다. 여자는 얼굴을 돌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빨갛고 노란 낙엽이 창가로 퍼붓는 듯 쏟아지더니 기차는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거울에는 낯선 내가 보이고, 기차 안은 굴속을 달리고 있어 더 어두침침했다. 그때 나는 다음 칸에는 누가 타고 있는지 들어가 보고 싶었다. 졸졸 흐르는 세면대의 물을 잠그고 오줌을 누었다.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오줌 소리가 들리지도 않아 내가 오줌을 누고 있는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쇠문 밀고 밖으로 나오자 앞 칸에서 그 장사치가 수레를 밀고 오고 있었지만 낮은 촉수의 형광등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흐리게 보였다.

  ‘도대체 이 기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다음 칸에 들어섰다.

  그가 내 코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아아, 난 지금까지 한번도 그의 얼굴을 옳게 본 적이 없다.

  그 칸에도 사람들은 다 눈을 감고 있었고, 기차는 아직 굴을 빠져 나오지 못해 창문에 비친 보든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긴 의자에 긴 몸을 기대고 있었다.

   밤이 깊어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이 기차 안에는 어린 아이 하나 없었고, 흔히 들리던 아기 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기차는 긴 굴속을 빠져나온 것 같았지만 창밖은 캄캄했다.

  아.

  나는 다시 다음 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도, 또 그 다음 칸도 모두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는 생물체처럼 사람들이 의자에 붙어 있었다.

  아아.

  난 꿈속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던 강의실을 찾아 헤매듯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내 등을 톡톡 쳤다.

  “어디 가세요?”

  뒤돌아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보이지 않던 차장이었다.

  “아, 다음 칸에 가보려고요.”

  나는 지쳐 있었는지 겨우 그렇게 말을 했다.

  “거기는 기관실입니다. 기관사뿐이에요.”

  아.

  난 어느새 첫째 칸까지 다 걸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유리문 앞은 희미한 불빛 대신에 시커먼 기관차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 오셨죠?”

  차장이 물었다.

  “가장 뒤 칸에서요. 10호차인가?”

  “네? 이 기차는 여섯 칸뿐입니다. 가장 뒤쪽은 화물칸이고요, 그 바로 앞이 6호차입니다.”

  “네, 그럴 리가요? 전 분명히.”

  난 차장에게 더 묻지도 않고 그를 앞질러 빠르게 걸었다.

  2호, 3호, 4호, 5호, 6호, 하나같이 희미한 형광등 밑을 지나 난 6호차에 들어섰다. 하지만 거기도 지나온 5호차와 똑같았고, 마지막 뒷문을 열자 거기는 온통 짐들로 꽉 차 있었고, 한가운데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까 그 장사치인 것 같았다. 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그 문을 닫고 다시 뒤돌아서서 서둘러 내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내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난 아까 쥐포를 먹었던 그 여자가 그리워지기까지 해서 그 나이가 들어 보이던 여자를 찾고 또 찾았지만, 모두를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댄 얼굴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생물체들은 아무 말 없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난 괴로워서, 괴로워서 꿈길에도 소리쳤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내개 앞 의자 뒤 거물에 꽂아두었던 학꽁치 비닐 봉투와 그녀가 땅바닥에 흘렸던 쥐포와 그 봉투였다.

  ‘그래, 그걸 찾자, 그러면 거기가 내 자리일 것이다.’

  그때 6호차 문을 열고 차장이 들어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학꽁치포 봉투와 쥐포와 쥐포 봉투를 찾고 또 찾았다.

   “그래, 자리는 찾았나요? 저 기차표 좀 볼 수 있을까요?”

  차장이 바로 내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걸 보고 찾아드릴 수 있어요.”

  난 차표를 찾았다.

  하지만 틀림없이 가지고 왔는데 봉투에 들어 있지 않던 한 장짜리 출석부처럼, 기차표는 주머니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냥 타신 거면 여기서 표를 끊어드릴 수도 있어요.”

  점잖게 생긴 차장이 슬쩍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마지막 역까지 갑니다만.”

  “이 기차는 마지막 역에 가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마지막 역에 가지 않는다니요?”

  “계속 돌고, 돌고 뿐이죠.”

  “그게 무슨 꿈같은 소리입니까?”

  “꿈같다니요?”

  “아뇨, 내 꿈에서는 늘, 난, 아아.”

  “꿈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것 나쁜 것을 모두 그 속에서-.”

  “하지만 나쁜 꿈에서는 빨리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나는 진짜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저 화물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왜 다시 오지 않는 거죠?”

  “아, 그에게는 거기가 쉬는 곳이에요. 몸이 지치면 마음이 지치고, 마음이 지치면 몸이 지치게 되니까요.”

  “네. 누구에게나 지친 영혼이 쉴 곳이 필요하죠.”

  “지금 종교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뇨, 그것만이 아니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노래를 듣든, 좀 걸어 다니든.”

  기차 차창 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창밖은 벌써 새벽이 온 게다.

                              - 끝 -  2009/10/2

         전자우편

                                                             김    영 관 (소설가)

  삶이 정말 어렵다거나 갑자기 휘청거리게 되었다면 글을 쓸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난 그런 걸 벌써 몇 번이나 겪었다.

  처음에는 비틀거렸지만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됐지.”

  “기회란 또 올 거야.”

  “어렵지만 얼마 동안은 참아야지.”

  그는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도 오지도 않는 전자우편을 10년째 열어보고 있다.

  “나는 그만두라는 소리를 전화로도, 전자우편으로도 받아보지 못했어요.”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그만두게 된 거에요?”

  그가 나에게 물었다. 

  “오라는 말이 없더군요. 이미 내 이름도 빠져 있고.”

  “하지만 전자우편이라도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는 전자우편만 믿고 있다.

  “그것보다는 전화가 낫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오늘 토요일과 내일 일요일이 지나면 모레 월요일에 전화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욕먹지 않을까요? 전자우편은 마음대로 지우거나 받지 않을 수도 할 수 있지만.”

  “왜 내가 욕을 먹어요? 욕을 할 사람은 난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하루빨리 모레가 오기만 기다렸다.

  “왜 그만두라는 소리라도 먼저 나에게 하지 않았나요?”

  나는 전화기를 꽉 잡고 말했다.

  “아, 그건.”

  저 쪽은 그렇게 말하며 잘도 빠져나갔고, 전화는 곧 끊겼다.

  “그런 전화는 다 그래요.”

  그가 전자우편함을 막 닫으며 나에게 말했다.

  “거기엔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요?”

  내가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아뇨. 그래도 아나요, 있을지.”

  “거기로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좋은 소식이 온 적이 있나요?”

  “아뇨. 중요한 건 이리로 오지 않아요, 전화로 오지.”

  “그런 전화는 몇 번 받았나요?”

  “몇 번 받았죠. 그러니까 내가 아직 먹고 살고 있죠.”

  그의 옆에는 오래된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머리도 감고 수염도 좀 깎으세요, 자신감이 있어야죠.”

  “당신이나 그러시구려.”

  하기야 나도 어느새 수염이 까칠해졌고, 머리에는 비듬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오지도 않는 전자우편을 기다리고, 나는 전화를 기다린다.

  일자리를 하나 잃어갈 때마다 자신감은 반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게 머리와 얼굴에 먼저 드러났다. 머리카락이 세고 빠졌으며 얼굴은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어딘가 삶에 지고 말았다는 구슬픈 아픔은 그에게 아련한 눈동자를 새겨놓았다.

  “빠져나갈 곳은 없나요?”

  “글쎄요, 좀 더 기다려봐야죠.”

  “어딘가 있겠죠?”

  “에.”

  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런데 이제 그 오지도 않는 전자우편은 그만 볼 수 없나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여기서 하루를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보아야 해요. 언젠가는 이리로 좋은 소식이 올 거예요.”

  그는 다시 전자우편함을 열어보았지만,  거기에는 새로 들어온 전자우편이 없었다.

  “나는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지는 않아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기다리죠.”

  “그래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나요?”

  “있었죠, 그런 게 왜 없었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게 언제였던지 아득하기만 했다.

  “요즘에도 걸려오나요?”

  그렇게 물을 때는 잠깐이나마 그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아뇨. 지난 2년 동안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내 말에 우리는 다시 풀이 죽었다.

  “우리 둘 가운데 누가 먼저 좋은 소식을 받게 될까요?”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글쎄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난 속으로 아무래도 전화로 먼저 받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또 전자우편함을 열어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은 전자우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닭고기는 집에서 튀겨 드시나요?”

  “아뇨, 왜요?”

  “난 집에서 아내가 튀겨주거든요.”

  “그런 말을 왜 내게 하시는 거죠?”

  “이자가 너무 비씨거든요.”

  나는 그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닭고기를 하나 사는데도 이자가 붙을까?

  그 자리에서 직접 튀겨주는 것을 그 자리에서 돈을 내고 나온다면 이자 따위는 붙지 않겠지.

  “이게 마지막 사과인가요?”

  그와 그의 아내는 늘 내게 사과 한 접시를 내놓는다.

  “아뇨, 시골에서 어머니가 또 부쳐주겠죠.”

  “어머니도 힘이 드실 텐데?”

  “그건 그래요. 불도 때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요.”

  “이 겨울에 말입니까?”

  난 믿기지 않아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럼요, 봄, 가을에는 땔 필요가 없겠죠.”

  그의 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내가 물었다.

  “네, 조금.”

  그는 그렇게 아픈 것 같지도, 아프지 않은 것 같지도 않았다.

  “자, 이제 갈 때가 되었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시게요?”

  “네? 그만 집으로 가야죠.”

  “이동전화라도 하나 사세요.”

그가 문간까지 바래다주며 말했다.

  “아뇨. 집에 전화가 있으니까요.”

  그의 아내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우리가 먹은 사과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전자우편으로 좋은 소식이 많이 오길 바랍니다.”

  “아하, 이거. 당신도, 전화로 좋은 소식이 많이 오길 바랍니다.”

  우리 둘은 가볍게 절을 하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나는 몇 년 동안 한번도 그의 집에 가지 못했고, 그도 우리 집에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몇 년 뒤, 드디어 나는 전화로 어디로 나오라는 좋은 소식을 들었고, 이제 며칠 뒤면 일을 하게 되어서,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따르릉, 따르릉-.”

  신호는 울렸지만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어디라고 간 걸까?’

  다음 날, 난 다시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같은 사람에게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하는 것은, 바로 그 좋은 소식이 있기 전에는 한번도 없었다. 아니, 요 몇 면 동안은 나는 어는 누구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슬슬 그가 좀 걱정이 되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가가 살던 동네도 좀 바뀌어 있었지만, 그의 집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대문에 전에는 있었던 초인종이 없고 그 자리에 전자계산기 같은 게 박혀 있었다. 난 처음에는,

  ‘아, 서로 얼굴을 보고 문을 열어주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글자가 쓰여 있었다.

  - 하고 싶은 말은 여기에 쓴 다음, 엔터를 치세요.  -

  나는 화면 바로 밑에 있는 아주 작은 글자판을 하나하나 눌렀다.

  - 이 보게, 날세. 나 000야. 어서 문 좀 열어주게. -

  그러자 바로 그가 보낸 듯한 글자가 나왔다.

  - 000? 잘못 보낸 편지입니다. -

  - 아니야, 나란 말이야. 000. -

  - 보낼 수 없는 편지입니다. -

  그건 그가 내 편지를 지우고 더는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 계산기 같은 글자판 대신에 대문을 손으로 쾅쾅, 쳤다.

  “이 보게, 000. 나 000이야. 제발 문 좀 열어주게!”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또 삐, 소리와 함께 글자가 나왔다.

  - 더 시끄럽게 하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

  나는 이제 그 글자판은 손바닥으로 때려버리고, 발로 문을 찼다.

  “이봐, 000. 문 좀 열어! 나야 나, 000!”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신고가 들어왔어요. 누구시죠?”

  젊은 경찰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 이 사람 친구입니다만.”

  내 말에 젊은 경찰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나이든 경찰이 내게 다가와서는,

  “이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아요.”

  “네? 그럴 리가요?”

  “처음에는 이 집주인이 신고해서 그와 같이 우체부, 전기, 가스, 수도 검침원들이 다 경찰서에 왔다갔어요. 그 다음부터는 처음 오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집을 찾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 이 글자판을 부쉈군요.”

  나이든 경찰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경찰서까지 가주어야겠다고 했다.

  “그럼 그가 경찰서까지 오나요?”

  “아뇨. 그는 오지 않아요.”

  “그럼 요즘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요?”

  “네, 아무도.”

  “안에 사람에 살고 있기는 있어요?”

  “네. 있기는 있어요.”

  젊은 경찰이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나는 이제 어둠에 묻혀 있는 그의 집 앞을 터벅터벅 걸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나 신문이나, 청구서 따위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안에 사람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아니 이제 그에게 올 편지나 청구서가 있을까?

  “그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우체부와 수도검침원 둘뿐이에요. 시골서 오는 소포와, 아무래도 그건 먹을 것 같은데, 우체부 말로는 사과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전기 없이는 살아도 물 없이는 못 살잖아요.”

  난 아까 경찰서에서 나이든 경찰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때 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전자우편을 한번 보내보자!’

  난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수첩을 뒤져 어딘가에 써놓은 그의 전화번호와 전자우편 주소를 찾아내었다.

  - 000. 나 000이네. 이 전자우편을 받거든 답신을 해주게. 자네가 몹시 걱정이 되는군. -

  난 그렇게 쓰고 전자우편을 보내고 기다렸지만 답신은 금방 오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은 전자우편을 볼 것이다. 아니, 요즘에는 더 자주 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다시 전자우편을 열어보았다.

  아니, 그런데, 내가 보낸 전자우편이 보내지지 않고 되돌아와 있는 게 아닌가! 난 다시 한 번 그에게 전자우편을 보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아무리 걸고 또 걸어도, 전화는 받지 않았다.

  나는 그날 그를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담벼락 위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고, 대문에 있던 글자판은 고장 나 쓸모가 없었다. 대문을 세게 두드려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발 문 좀 열어! 문 좀 열라고!”

  난 주저앉아 열리지 않는 대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소리쳤다. 

  참말로 그와 연락할 방법은 없을까?

  정말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 끝 -      2009/2/23

2009/8/25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

                                          김    영 관 (소설가)

  마음자리를 잡다보면 잡아진다.

  그게 안 잡힐 것 같지만, 불교 그림에서 고삐를 잡고 있으면 이리저리 잘 뛰던 소처럼 차츰 얌전해진다. 그리고 나중에는 고삐를 풀어놓아도 멀리 가지 않는다.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입니다.”

  “어느 부분이 울고 싶은 부분인데요?”

  “아버지가 고생을 해서.”

  “그럼 울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나요?”

  “네?”

  내 말에 여자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저희도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할 부분이고요.”

  “부분이 참 많네요?”
  “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렇게 부분만 좋아해서 뭐에 쓰겠어요?”

  “네?”

  내 말에 은행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보지를 못하고, 큰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울고 싶군요.”

  차라기 그렇게 말하는 게 낫지만, 그것보다는 눈물을 참는 게 낫다.

  흐르는 눈물.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은행원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면 된다.

  난 은행원 말만 믿고 그렇게 했던 거니까.

  아버지가 아파도 그녀는,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렇게 말을 할 것이다.

  요새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부분을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부분이 잘 지어지고, 말이 다듬어져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처구니가 없다.

  울 때 울지 못하고, 웃을 때 웃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 지르지도 못하고, 잘못을 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도 못하고, 잘하는 건 아기똥한 것 하나.

  “사실상 일정 부분 씻어야 될 부분이고요.”

  은행원은 그렇게 말하며 제 발을 씻었다.

  발 하나 씻는데도 네미, 정말 그 따위로 말을 해야 할까?

  일정 부분 냄새가 아래층에서 솔솔 올라온다.

  담배 냄새, 개 냄새, 지린내, 땀내, 똥내.

  그건 일정 부분 아래층에 책임이 있다.

  창문을 열어놓은 우리 집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우리 집에는 냉방기가 없어.”

  “무슨 집에 냉방기도 하나 없어요?”

  잘 사는 은행원이 물었다.

  “그래도 선풍기는 세 대나 있다오.”

  “그럼 일정 부분 책임이 있네요?”

  “무슨 책임?”

  “냉방기 없는 책임에, 창문 열어놓은 책임.”

  “그럼 두 부분이네? 그러면 아래층에서 창문을 열어놓은 것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겠네?”

  내 말에 은행원은 쳇, 하며 돌아갔다.

  ‘저가 아래층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일정 부분 책임 있는 놈이다.’

  이럴 때 난 그 여자가 하던 말을 쓰고 싶다.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재채기가 나는 건 일정 부분 내 책임입니까?”

  “네. 그건 사실상 그래요.”

  또 그녀가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말했다.

  “왜요?”

  “담배를 피우셨죠?”

  “옛날에 피웠지만 끊은 지 꽤 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어디선가 포마드 머릿기름 냄새가 나는 듯해요. 지린내가 나는 게, 이거 참 미치겠군요.”

  “이야기는 담배 부분으로 통일해주세요.”

  “한자를 많이 쓰는 것 보니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네.”

난 이쯤에서 나이도 어린 여자에게 슬슬 말을 놓았다.

  “말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요.”

  “아니, 아래층에서 솔솔 올라오는 고린내 말이야.”

  도무지 서로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난 그만 또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그래, 지하 다방, 술집에서 피워댔던 술, 담배 책임도 있다. 하지만 그건 벌써 10년 전의 일 아닌가! 이제 아래층에서 이불을 퍽퍽 때리며 털고 있다.

  아아아.

  도무지 국어는 무엇 때문에 배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요즘 왜 이리도 많으냐!

  내 참 미치겠다.

  우리말을 써도 될 것을 온통 외국말을 쓰고, 집은 낮은 말이고 댁은 높임말이라니, 그럼 우리말은 낮은 말이고 한자는 높은 말이냐?

  내 참 기가 찬다.

  사전에도 버젓이 그렇게 되어 있다.

  이름은 낮은 말이고 함자는 높임말이라니, 내가 참 어이가 없다.

  자기 아버지 이름도 그냥 홍길동 씨입니다, 하면 되지, 어느 세월에 홍 자, 길 자, 동 자, 쓰십니다, 하겠느냐. 그러면 홍길동 씨라고 하면 불효고, 홍 자, 길 자, 동 자, 쓰십니다, 하면 불효하던 놈이 효자가 되나?

  이것도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이다.

  아니 자꾸 따라하면 그게 버릇이 되니까 이제 그만!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을 다음 삶에 또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마라, 고 한다.

  자, 그렇다면 어떤 미운 놈이 자기 옆을 지나다가 쏘아보며 실실 웃는다고 치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1. 발로 차거나 손으로 민다.

  2. 오히려 더 쏘아본다.

  3. 미워하지 않는다.

  4. 못 본 척한다.

  5. 속으로 성을 낸다.

  4번이 가장 나은 답이다.

  그런데 어떨 때는 2번도 효과가 있다.

  본디 먼저 때린 놈은 다리 오그리고 자고, 맞은 놈은 다리 펴고 잔다는 말이 있다.

  “맞은 사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난 그렇게 말하는 그 은행원을 차마 발로 찰 수는 없어서 손으로 살짝 밀었다.

  흐르는 눈물.

  난 눈물을 잘 믿지 않는다.

  그러나 보면 안다.

  진짜 슬픈 눈물인지, 가짜 눈물인지, 덜 떨어진 눈물인지를.

  나는 지난달에 의료보험료를 낼 돈이 없었는데, 이 달에 독촉장이 날아왔다.

  “집으로 뭐 그런 게 날아와요, 난 은행에서 다 내주는데.”

  “그렇겠지, 반은.”

  “그건 일정 부분 당신도 책임이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안 그럴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살았는데도 그렇다면,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운과 운수와 팔자와 운명이라는 것!

  은행원은 팔자가 늘어졌고, 그 여자는 결혼해서 팔자를 고칠지도 모르며, 난 팔자에 없는 돈을 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런 운은 복이 다하면 사라진다고 한다.

  하늘이 흐리다.

  곧 한바탕 비를 퍼부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가을바람이 불고 난 얼마 동안 숨을 쉴 수가 있겠지.

  흐르는 눈물.

  빗물이겠지.

  빗물은 짜지 않으니까.

  눈물을 보이지 마라.

  적에게.

  가을바람은 목련 끝에 머물렀다.

  염통이 튼튼해야지 오래 산다.

  오래 살고 싶으냐?

  그래!

  이제 일정 부분 책임이라는 말도 쓰지 않겠다.

  한번 마음먹었으면 지켜야지.

  이제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도, 은행원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내 마음 탓도 크다.

  마음자리를 잡아야지.

  그 여자는 은행원과 결혼을 해서 팔자를 고쳤다고 한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은행원은 결혼을 하고 팔자가 늘어졌을까?

  들리는 소리로는 영 팔자를 조졌단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결혼을 하고도 남편에게,

  “내가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이야.”

라는 말을 줄곧 해대니까, 남편이,

  “그건 너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

하고 맞받아쳤는데, 그러자, 여자가,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이라니까.”

하고 말했는데, 남편도 참지 못하고 그만,

“사실상 울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나라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팔자를 고친 건 아니다.

  복이 다하니까 운이 다하고 만 것이다.

  그럼 나한테는 돈이 팔자에 정말 없는 것일까?

  그건 모르지.

  아직 염통이 튼튼하게 뒤고 있으니까.

  아파트를 청소한 여자가 경비에게 꾸벅 절을 한다.

  그 여자는 키가 작고 다리가 굽었다.

  하지만 언제나 경우가 바른 사람이다.

  아카시아 숲에 비가 내린다.

  그녀가 쓸어놓은 아파트 계단에도 비가 내린다.

  그녀는 내일 다시 그 계단을 닦을 것이다.

  누구는 침을 뱉고 누구는 담배꽁초를 짓이겨도, 그녀는 내일 다시 그 계단을 쓸 것이다.

  너무 하지 않은가?

  눈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하지만 목련에 떨어지는 빗물은 따닥따닥 소리를 낸다.

  목련에 머물었던 바람이 비로 바뀐 것이다.

  이제 목련 잎은 더 튼튼해질 것이다.

  거친 가을이 오기 전에, 첫 겨울바람이 불기 전까지 목련 잎은 더 크질 것이다.

  아카시아 숲은 조용히 움츠러들었다.

  무슨 재개발을 한다고 철거된 집터에도 마른 비가 내린다.

  거기에도 눈물이 있었을 게다.

  흐르는 눈물!

  비는 비답게 내려야지 마른 비가 내려서야 쓰나.

  다른 곳은 다 젖어가도 그 곳만은 마른 비가 내렸다.

  오래오래.

  언제까지 거기에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쾨쾨한 골방을 찾아들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이제 눈물을 삼킬 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녀가 쓸어놓은 아파트에도, 목련에도 비가 내린다.

  아파트 담벼락도 젖어들고, 목련도 젖었지만 그 빈터에는 마른 비만 내린다.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사람을 그렇게 짐승 쫓아내듯 쫓아내도 되는 것일까?

  짐승도 누웠던 풀 자리가 있다.

  거기에 몸을 부비며 따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거기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마른 비이기 때문에 몸을 누일 곳은 없다.

  병든 짐승은 오래 살지 못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래, 눈물을 삼킬 줄 알아야지.

  그래야 제 어미나 아비처럼 일찍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울 때는 실컷 울어라, 괜찮다.

  눈물이 흐르거든 닦지 말고 놔두어라.

  이제는 괜찮다, 실컷 울어도 괜찮다.

  하지만, 말이다. 비가 그치면 냉큼 일어서야 한다.

  네 어미는 또 빗자루를 들고 벌써 나가지 않았느냐!

  너는 마른 비가 오는 땅을 잘 쓸어두어라.

  그러면 다음에는 그 땅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네 마음자리도 잘 쓸어두고, 더 크거든 네 어미와 아비와 형과 동생과 함께 따뜻한 집에서 눈이 쌓이는 목련을 바라보렴.

                        - 끝 -  2009/8/26 

2009/9/10

       영수 아내          

                                          김    영 관 (소설가)

  잠이 쏟아진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일까, 일을 많이 했다는 뜻일까?

  하여튼 영수는 잠을 쫓기 위해 덮어놓고 글을 썼다.

  아내는 바깥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집에서는 잠보다. 그래서 집안일은 영수가 하지만, 딱 한 가지 반찬 만드는 것은 아내가 한다. 아내가 안 게으르다는 것도 거짓말이지만, 바깥일이 힘드니까 아침에 늦잠을 잔다. 영수는 집안일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재수생과 고등학교 3학년이 일어나야 하니까, 새벽 6시에는 꼭 일어난다.

  영수는 아내가 간밤에 넣어둔 반찬과 밥만 넣은 도시락을 싸고, 둘 가운데 하나는 학교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와서, 국 끓이고, 물 끓이고, 빨래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 늘고 나면 이제 글을 쓰는데, 아내는 그때까지 자고 있다.

  그런데, 영수도 아침에는 글을 좀 쓰더라도 낮에는 잠이 쏟아져서, 어떨 때는 글자판 보고 있다가도 깜빡 잠이 들고 만다고 한다. 왜 그럴까? 다음 보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시오.

  1. 늙어서.

  2. 게을러서.

  3. 글을 못 써서.

  4. 잘 모름.

  영수 말로는 머리를 많이 쓰면 무척 지친다고 한다. 글은 대게 머리로 쓰니까 지쳐서 잠이 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아침 늦게 병원에 다녀오더니,

  “눈 안에 다래끼가 났단다.”

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영수에게 보여주었다.

  영수는 뭔가 잡히는 게 있어서 다짜고짜 국어사전에서 다래끼를 찾아보았다.

  다래끼 : 속눈썹의 뿌리에 균이 들어가 눈시울이 발갛게 붓고 곪아서 생기는 작은 부스럼. 불결한 생활환경, 만성 결막염, 편식으로 인한 영양 장애, 당뇨병 따위가 원인이다. 

  아까 영수가 집안일을 혼자 다 한다고 했지만 불결한 생활환경, 청소는 안 한다. 게다가 영수는 만성 결막염이 있고, 편식으로 인한 영양 장애까지는 잘 모르겠고, 당뇨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수도 아내가 눈에 다래끼가 나고 목이 아픈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영수 아내가 잠보라고는 하지만 바깥일에 지쳤기 때문이 아닐까? 영수가 돈을 거의 못 버니까, 말이다.

  다래끼와 바깥일과 잠보와 영수와 돈은 분명 무슨 연관이 있다.

  “아이고, 남남처럼 대해야지.”

  이럴 때 영수가 달아나기 위해 생각해낸 말이다.

  그런데, 영수는 왜 국어사전을 찾아본 걸까?

  아내가 병원에 다녀와서 눈 안에 다래끼가 났다고 하더라, 그래서 항생제를 주더라, 고 말했을 때 영수는,

  “자식들, 눈에 다래끼 났다고 항생제를 주더냐? 응, 자식들.”

하며 성을 냈는데 그것도 좀 이상하고, 또,

  “다래끼는 한방에서 뭐라고 하더라? 어린 아이 다래끼는 짜주기만 해도 낫는다고 하던데, 뭐라고 하더라, 한방에서 다래끼를-.”

이라는 말만 몇 번이고 아내 앞에서 되풀이해서 아내가 그만 성을 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영수는 왜 항생제와 어린 아이와 한방 다래끼를 물고 늘어졌을까? 또 눈 밖에 나던 다래끼가 이번에는 왜 눈 안에 난다는 말인가?

  영수는 이제 힘든 아내가 일하는 곳까지 차로 태워다주었다.

  “왜 이렇게 지칠까?”

  아내 얼굴이 까칠하다.

  밖에서 밤늦게까지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힘든 것이다.

  영수는 지금까지 다래끼라고는 한번도 나본 적이 없다. 몰라, 눈 안에 다래끼까지야 저절로 나았는지, 그게 만성 결막염으로 이어졌는지까지는 몰라도 하여튼 다래끼가 난 적이 없는 눈이지만, 요즘 컴퓨터 화면을 보고 글을 많이 써서 그런지, 늙어서 그런지, 그 결막염이 때문인지, 아니면 속 다래끼라도 났는지 모르지만, 눈이 침침해서 작은 글씨는 읽을 수가 없었다.

  진짜 아내 다래끼는 왜 났을까? 이번에는 그 까닭이 아닌 것을 하나만 고르시오.

  1. 영수가 집안 청소를 안 해서.

  2. 영수의 만성 결막염.

  3. 편식으로 인한 영양 장애와 당뇨.

  4. 영수가 돈을 못 벌어서.

  5. 알 수 없음.

  영수 아내는 편식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3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수는 5번을 정답이라고 우긴다. 마치 항생제와 어린 아이와 한방 다래끼를 물고 늘어졌듯이 우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1번과 2번, 4번은 모두 영수 책임이기 때문인데 참 쫀쫀한 놈임에 틀림없다. 아니, 쫀쫀하고, 약고, 못된 놈인지도 모른다. 나 원 참 더러워서.

  영수는 아버지의 안경을 찾았다.

  눈은 침침하고 살 돈은 없고.

  하지만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글을 많이 써서 그럴까? 술 탓은 없을까?

  이제 영수도 늙은 것이다.

  나이 쉰에 신문도 제대로 읽을 수 없어 큰 글자만 본다. 갑갑하다.

  아내는 새벽에 끙끙 앓았다.

  아내는 일이 힘이 드는 것이다.

  영수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저가 일어날 만하니 일어났고, 차를 몰 줄 아는 건 그뿐이고, 물 끓이고, 아내가 해놓은 국 끓이는 건 일도 아니고, 빨래야 세탁기가 하지 저가 하나?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도시락 반찬 싸는 거도 아니고 밥만 퍼 담는 것도 못하냐!  또, 빨래했으면 늘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밥 처먹었으면 설거지하는 거야 운동도 되고, 아무 생각 없이 도 닦는 데는 그저 그만인데, 하기는 저가 무슨 일을 한다고? 글 쓴다고? 나 원 참 더러워서.

  그러니까 옛날에 아내 다래끼가 밖으로 났을 때는 덜 힘들었던 것이다. 오죽 힘들면 듣도 보도 못한 눈 안에 다래끼가 났겠느냐!

  그런데 영수는 오늘은 이상하게 낮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라도 많이 처먹었는지 그것까지야 모르겠지만, 영수는 더 부지런히 글을 썼다. 그게 마치 힘든 아내에게 무슨 보답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난 오늘날까지 그가 쓴 글로 책 팔아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들리는 말로는 그 책도 그가 억지로 펴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생활비에 보태기는커녕 팔리지도 않은 책을 펴내 축만 낸 셈인데, 그래도 그는,

  “난 이름을 알리려고 책을 펴내진 않았다.”

고 잘도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펴냈다는 말인가?

  그건 시간 나면 물어보기로 하고, 여기서 쫀쫀한 놈 이야기 더 해봐야 무슨 쓸데가 있겠느냐.

  그러면 영수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말해보겠다.

  난 그의 아내다.

  그가 하도 글 쓰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둥, 어디까지나 사람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둥, 내세우기 때문에 그 놈의 글 나도 한번 써보자 싶어서 이름을 감추고 이렇게 써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써보니 뭐 그렇게 어렵지도, 또 솔직히 쉽지도 않았지만 이만큼 썼으면 웬만하지는 않나 싶은데, 이제 남은 건 이걸 그 잘난 남편에게 보여주느냐, 마느냐, 보여주고 아니꼬운 말이라도 듣느냐, 아니면 그냥 이렇게만 혼자 줄곧 써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걸 글이라도 썼어?”

  남편의 첫마디였다.

  “이럴 시간 있으면 반찬이나 더 만들어.”

  “뭐라고요!”

  난 남편이 들고 있던 내 원고를 탁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소설은 뭐 안 그럴 줄 알아? 그게 일긴지, 수필인지, 나 원 참 더러워서, 흥, 쳇!”

  난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입을 딱 벌리고만 있는 남편을 못 본 척하고 뒤돌아서서 가장 되바라지게 걸어갔다.

  난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하도 고소해서,

  “호호호.”

하는 웃고 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그때 내 탓인지는 몰라도, 남편은 그 뒤로 새로 쓴 글들이 조금씩 팔리더니, 어떤 책은 아주 많이 팔려서, 난 그 힘들던 바깥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이나 하자며 들어앉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본디 하던 집안일을 그대로 다 했다.

  왜?

  가만히 보니까, 남편은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또 운동 삼아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밥을 먹고 배가 부른 채 금방 의자에 앉아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그까짓 설거지 한 10분 한다고 배가 꺼지는 것도 아니어선지 다리 튼튼하라고 분리수거하러 가고, 팔뚝 튼튼하라고 빨래 대야를 번쩍 들어 빨랫감을 세탁기 넣고는, 세탁기를 틀어 계곡물 소리처럼 그걸 듣는 것이고, 집안에만 있기 답답하니까 재수생과 고등학교 3학년 아이 학교까지 남산 순환도로를 달려 차로 태워다주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낙엽 지는 은행나무라도 쳐다볼 거고, 뭐 다 뻔한 일들이었다.

  또 물을 한 주전자 끓여놓으면 하루 내내 혼자 커피 타서 마실 수 있고, 남편은 식은 커피도 잘 마시니까, 내가 다 해놓은 반찬에 도시락 싸주면 좋은 아빠라도 소리도 들으니, 그때까지 난 자고 있기는 있지만, 가만히 보면 자기한테는 하나 해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난 반찬이나 김치 담는 것, 어디 가서 싸게 장 봐 오는 것 말고는 남편처럼 그렇게 부지런하게 할 수는 없었다.

  첫째, 새벽 6시에 일어나지를 못한다. 

  둘째, 세탁기가 있어도 빨래를 날마다는 못한다.

  셋째, 운전면허는 있지만 면허증은 장롱 안에 있다.

  넷째, 밥 먹고는 좀 쉬어야지 막 바로 분리수거나 설거지는 못한다.

  내가 다래끼가 나서 약을 먹었을 때 남편은 그때마다 얼굴을 찡그렸고, 찢어진 약봉지를 싹 가져다가 비닐 모으는 데에 집어넣곤 했다. 남편은 약을 거의 먹지 않는데, 피와 기만 잘 흐르면 된다는 소리만 하고는 손바닥을 비벼 눈에 대기도 하고, 고치법인지 고슴도치인지 이빨을 딱딱 부딪쳐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귀를 몇 십 번도 더 비비며, 또 어디라도 갈 때며 혼자 반시간은 먼저 복도에 나가 기다리면서 맨손체조를 한다.

  세상에서 못 볼 것은 남편 찡그린 얼굴이다.

  그건 못된 망나니 같기도 하고, 쭈그렁이 같기도 한,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얼굴이다.

  “찡그리지만 않으면 당신 얼굴도 괜찮은데 왜 자꾸 찡그려?”

  하루는 내가 물어보았다.

  “일부러.”

  “왜?”

  “그래야 무섭지.”

  “호호호.”

  난 남편 말에 또 웃고 말았다.

  난 이런 남편과 벌써 20년을 살았는데 남편은 100살까지 산다고 하니 앞으로 한 50년은 더 같이 살아야 한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가보니까 세상이 바뀌었더군. 난 더 커진 것 같은데 세상은 작아졌어.”

  남편은 지난 학기 있던 강의 다 놓치고 집에서 푹 쉬었으니까, 이번 가을에 아홉 달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나간 것이다, 그것도 금요일 딱 하루만!

  “세상이 어땠는데?”

  난 묻기 싫었지만 묻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난 아홉 달 난 놀지 않았다는 거지. 무언가 부지런히 글을 쓰고 일을 했으니까 키 큰 나무처럼 난 더 자랐는데, 이상하게 세상은 자라지도 않고, 아니 더 작아졌더군.”

  남편은 뭔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째, 본디 작은 남편의 키와 어깨가 좀 크진 것 같기도 했지만, 아, 참, 그러고 보니, 남편은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20개는 꼭 한다.

  자기는 커졌는데 세상은 작아졌다는 남편은 세상을 우습게 봐서 돈도 못 버는지 모르지만, 이 일로 남편의 기는 더 세어졌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런 생각으로 쓰는 책은 점점 더 팔렸지만, 남편 싫어하는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났다. 내가 보기에 남편은 오로지 혼자라, 어떨 땐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안 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잘난 글이라도 붙잡고 있으니 그렇지, 그거 아니면 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가을이다. 매미 소리도 사라지고, 감잎도 시들었다.

  아침부터 끄무레하던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더니 기어코 비를 퍼붓는다. 그 비바람에 창밖 나무들이 몸서리를 치고 빗물은 창문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남편은 뭔가 삶에 진득진득하게 눌어붙어 그걸 이야기로 쓰는 것이다. 마치 흘러내리던 빗물이 방충망에 거미줄처럼 고여 있듯이.

  “당신도 이제 제법 쓰는군.”

  제법이라는 말이 못마땅했지만, 남편이 내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젠 나도 글은 혼자서 쓰는 것이라는 걸 안다.

  눈치 빠른 남편이 자리를 비켜준다.

  날이 개고 파란 하늘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끝 -   2009/9/12  

2009/9/7

          도깨비

                                                 김     영 관 (소설가)

  내가 쓸 수 있는 건 이야기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쓰기뿐이다.

  난 지난 2년 동안 글만 썼다.

  단편소설 100편!

  “엄청나군요.”

  누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자꾸 잠이 온다.

  글과 글 사이에 또 잠이 온다.

  글을 놓치면, 따라잡지 못하면 잠이 온다.

  하지만 자꾸 자서는 안 되지.

  네 얼굴과 몸을 갉아먹으니까.

  지금 네 얼굴을 바라보아라, 그 게슴츠레한 눈과 풀린 눈동자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는 일뿐이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건 이런 이야기뿐이다.

  아무도 믿지 마라는 이야기는 이미 다 썼기 때문에 이제는 쓸 수가 없다.

  난 어디까지나 혼자이며, 그래야만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썼다는 말입니까?”

  “네. 단편소설 100편.”

  “그걸 한번 읽을 수 있을까요?”

  “책으로 나오거든 읽어보세요.”

  “언제쯤?”

  “단편소설 10편이 대게 책 한 권이니까, 앞으로 10년 동안 해마다 나올 겁니다.”

  “그럼 올해 쓴 것은 10년 뒤에나 읽을 수 있겠네요?”

  “해마다 책이 안 나온다면, 올해 것은 내년에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두 일을 하러 나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나보죠?”

  “내가 있잖아요?”

  “예? 아, 하하하.”

  그는 좀 실없이 웃었다.

  그는 심심할 때마다 가끔씩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나는 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여기서 그 녀석의 이름이 벗이라는 것만 말해두겠다. 생긴 건 정수리가 남달리 위로 불쑥 솟은 짱구고, 귀도 어울리지 않게 크며,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와 입도 우악스럽게 크고, 한마디로 못생긴 놈이다.

  나는 도깨비 같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창밖에는 가을바람이 살살 불고 하늘은 맑았다.

  어찌나 맑은지 나뭇잎마저 설렌다.

  “도깨비는 심술궂은 짓을 잘 하지만, 당신도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나 쓰고 있지 않나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 미운 도깨비에게 물었다.

  “난 도깨비니까요. 오죽 하면 나를 벗 삼아 글이나 쓰고 앉아 있겠어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 쓰는 일 뿐이다.”

  “가장 못하는 게 돈 버는 일이죠?”

  “알면서 왜 물어? 넌 다 안다면서?”

  이번에는 도깨비가 시무룩해졌다.

  난 속으로, 아, 요 녀석 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뇨. 아니에요.”

  “넌 힘도 세고 재주도 많다며?”

  “흔히 그렇다고들 하죠.”

  난 녀석 말투를 듣고 속으로, 책 좀 읽었군, 하고 생각하며,

  “그럼 도깨비 방망이로로 금 나와라, 뚝딱, 한번 해봐.”

하고 말했다.

  “방망이가 있어야 하죠, 도깨비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금과 은은 그 방망이에서 나오는데, 그걸 도깨비라고 함부로 주지는 않아요.”

  “그걸 누가 주는데?”

나는 눈을 반짝여가며 물었다.

  “몰라요, 하여튼 모두들 다 하나씩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넌 왜 없어?”

  “그러니까 이 집 도깨비죠!”

  녀석이 하도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난 안 그해도 안 좋은 왼쪽 귀가 찡해서 좀 성이 났다.

  “에이, 씨-.”

  난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가 도깨비가 날 노려보는 바람에 다시 내려왔다.

  “참 못됐네요.”

  도깨비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듣고 꼼짝도 못했다.

  난 못됐다.

  도깨비는 그걸 나에게 알려주었다.

  “머리는 며칠에 한번 감으세요?”

  도깨비가 갑자기 큰 코를 벌름거리며 물었다.

  “사나흘에 한번. 그건 왜 물어?”

  “음, 대엿새 만에 안 감으니 그건 됐고요, 온몸은 며칠에 한번 씻나요?”

  “온몸은 한 달에 한번.”

  “음, 그러면 그것도 됐고요, 머리카락은 얼마 만에 깎나요?”

  “서너 달에 한번.”

  “네, 모두 됐습니다.”

  “야, 이 놈아, 그건 왜 물어?”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물었다.

  “아뇨, 내가 이 집에 벗으로 같이 있으려면 서로 그런 것들이 맞아야 하거든요.”

  “싱거운 놈.”

  내가 빈정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도깨비는 도깨비 방망이 하나 없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너 언제 갈 거야?”

  내가 슬쩍 녀석을 째려보며 물었다.

  “갈 때는 언제든지 갑니다.” 

  난 또 그 말에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도깨비 방망이 하나 없어도 사람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가서 정말 돈은 안 벌 겁니까?”

  녀석이 갑자기 집에만 있기 답답한지 그렇게 말했다.

  “나가보아도 나한테 올 돈은 없어.”

  “도깨비 같은 소리군요.”

  “참 많이 나가보았지. 안 가본 데가 없을 걸?”

  “거기엔 우편 따위로 부친 것도 다 들어가겠죠?”

  도깨비는 도깨비다.

  “그래, 왜?”

  “왜는 왜요?”

  나는 녀석이 심술궂은 말장난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지난 20년 동안 200곳도 넘게 지원서나 소설을 부쳤지만 한번도 돈을 벌지 못했다.

  “참 번듯하시네요.”

  녀석이 이제 대놓게 나에게 비아냥거렸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걸 내가 아냐, 이놈아!”

  난 또 성이 났다.

“팔자가 사나운가 봐요.”

  난 기가 차서 더는 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도 술은 꽤 드시는군요?”

  “그래, 이놈아, 물 탄 막걸리도 못 마시냐?”

  “네? 물 탄 막걸리라고요?”

  “그래, 이놈아.”

  “아, 그걸 오래 마시면 사람이 도깨비가 됩니다.”

  “뭐라고? 헛소리 지껄이지 마!”

   “아니오, 날 보시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허연 도깨비가 된 거라고요.”

  “너 마음대로 지껄여.”

  난 돌아서서 쓰던 글이나 다시 썼다.

  그런데 그 도깨비가 가지 않고 내 뒤에 서서 무얼 쓰는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야, 이, 씨-!”

  난 욕이 거의 다 튀어나왔다.

  “그렇게 너무 쓴다고 글이 잘 되는 거 아니에요.”

난 그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려 녀석의 볼때기를 후려치고 말았다.

  “아!”

  하지만 녀석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붙어 앉아 글만 쓴다고 글이 잘 되는 건 정말 아니다!

  “미안.”

  난 도깨비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하늘은 푸르렀다.

  뭉게구름은 가을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밖에 좀 나가보시지요?”

  “할 일 없이 나가진 않아.”

  난 정말 밖에 좀 나가고 싶었지만, 뭐 할 일 없는 놈 같아서 나가기가 싫었다.

  “막걸리 사러 가면 어떨까요?”

녀석이 날 꾀는 말을 했지만, 난,

  “오늘 먹을 막걸리는 있어.”

  냉장고에는 막걸리가 아직 반 통 남아 있었다.

  “더 사다놓았다가는 식구들 보기 미안하고, 그래서 내일쯤 가려는 거죠?”

  “그래, 잘 아네.”

  난 이제 대꾸도 하기 싫었지만,

  “그런데 말이야, 너 물 탄 막걸리를 오래 먹어서 도깨비 되었다는 거 거짓말이지?”

하고 물어보았다.

  “아뇨, 진짭니다.”

  “그래? 그러면 말고.”

  나는 말을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곧 생각에 빠졌다.

  ‘내가 도깨비가 된다?’

  그때 아침부터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던 아래층에서 벽을 쇠망치로 때려 부수는지 쾅쾅,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도깨비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몹시 괴로운 듯,  

  “아아, 저 소리만은-. 우리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이 바로 저런 시끄러운 소립니다, 아아, 어쩌자고-.”

하고 말하더니, 벽 속으로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 여태까지 우리 집이 조용해서 살았던 게군.’

  이제는 나도 그 소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창문을 닫고 반대쪽 방에 가서 글이라도 쓰려고 했는데, 쾅쾅, 울리는 소리가 온 벽을 타고 무너져 내렸다.

  ‘에이, 막걸리나 사러 가자.’

  나는 푸른 햇볕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왔다.

  아직 햇살은 따가웠지만, 이건 내 몸을 구리 빛으로 태울 것이라 생각하니, 햇볕만 많이 받으면 허연 도깨비가 될 리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람으로 사는 게 좋지, 도깨비가 되어서 무엇 해.’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디며 야트막한 달맞이 산을 올랐다. 굳이 거기로 해서 갈 건 없지만, 또 아카시아와,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개나리, 나팔꽃들 펼쳐진 산길을 굳이 안 걸 것도 없었다. 한강 쪽에서 거기 꼭대기까지는 몇 백 개의 나무 계단을 밞고 올라야 하는데 멀리 바라보이는 강물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 모습이 아주 빼어난 곳이었다.

  ‘도깨비가 좋을까, 사람이 좋을까?’

  녀석처럼 도깨비 방망이 하나 없이 우리 집에 곁들어 사는 것보다는, 이처럼 푸른 하늘과 땅을 걸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기도 하고, 금을 불러내기도 하는 방망이를 든 도깨비라면?

  아아.

  난 좀 괴로웠다.

  돈이야, 사람이냐, 도깨비냐, 방망이냐?

  땀을 흘리며 큰 막걸리를 네 통이나 들고 집으로 돌아왔건만, 쾅쾅 벽을 때려 허무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제기랄!”

  난 얼추 땀을 씻어내고, 일부러 텔레비전을 켜서, 송구 중계방송을 보며 물 탄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이 밥을 먹었다. 그때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글을 쓰려고 앉았지만,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도깨비하고 물 탄 막걸리나 마시며 이야기라도 하면 얼마만큼은 시끄러운 소리도 잊을 수 있겠지만, 도깨비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녀석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가 도깨비를 그리워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이나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면 그걸 못 견디고 어떻게든 헤살을 놓지 않으면 놈들은 할 짓이 없으니, 집이나 자꾸 뜯어 고치고, 비싼 차나 물건을 마구 사들이며 돈 지랄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더 발랑 되바라져서 까불거나, 길바닥에 일부로 침을 탁탁 뱉으며 못나게 주절거리는 것이다. 그럴 때는 도깨비 방망이로 한 놈이 쥐어박으며 새 사람이 될 텐데, 말이야.

  저녁이 되자, 그런 녀석들도, 그 시끄러운 소리들도 물러갔다.

  “도깨비 있으면 나와.”

  난 벽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난 이번에는 물 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셔서 트림도 하며 녀석을 꾀어보았지만 도깨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난 쓸쓸해졌다. 다음 날은 아래층 공사 소음도 훨씬 줄어 글이 잘 쓰이지 않았다. 녀석은 어디로 간 걸까? 도깨비 방망이가 없더라도 녀석이 있으면 왠지 덜 심심했다. 괜히 내가 자꾸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그거야 가까운 사이라고 내가 함부로 대했기 때문인데,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 대하듯 좀 조심하면 될 것이고, 아니 오히려 좀 두려워하듯 하면 될 것이고, 그나저나 녀석은 왜 안 나타나는 걸까?

  “우리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이 바로 저런 시끄러운 소립니다.”

  나는 도깨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소리가 어디 공사 소음뿐일까? 시끄러운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못된 놈들이 일부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돈 지랄하는 소리, 저만 잘 살겠다고, 저만 잘났다고 외치는 소리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나는 어느새 물 탄 막걸리에도 취해 혼자서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에이, 좀 더 일찍이 그러시지.”

하며 그 도깨비 녀석이 벽에서 스르륵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야, 이 놈아, 그러면 너 내가 그 말 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야?”

  나는 좀 성이 났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 나도 좀 생각해볼 것도 있고 해서.”

  “야, 도깨비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다 알든지, 아무 것도 모르든지, 아니면 되는 대로 그냥 움직이겠지.”

  “아뇨, 이제는 옛날 같지 않습니다. 저만 더 잘 살겠다고 멀쩡한 집을 괜히 부수는 일만은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러면 그 먼지, 그 시끄러운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 그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윗대가리들이 그걸 못하게 막으면 될 터인데, 불쌍한 사람들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저희가 먼저 앞장서서 그런 짓들을 하니, 나, 원, 참!”

  “자주 말씀하시는 그 돈 지랄 말인가요?”

  “음. 그런데 넌 도깨비가 좋아?”

  “그런 이야기는 물 탄 막걸리나 한 잔 더 마시며 하죠?”

  “그래.”  

  그로부터 몇 달 뒤, 그 집에는 도깨비 방망이를 든 도깨비가 하나 더 나타나, 밤마다 둘이 물 탄 막걸리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나는 다음 날이면 멀쩡히 글도 쓰고, 또 막걸리가 떨어지면 사와서 벗과 함께 마시곤 했다.

                          - 끝 -   2009/9/9

2009/9/6

             꿈

                                          김    영 관 (소설가)

  새벽녘에는 못다 한 꿈들을 꾼다.

  바로 일어나기 전에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못다 이룬 꿈을, 그렇지 않으면 뒤숭숭한 꿈을 꾼다.

  작은 아들은 열 살 때도,

  “피터 팬!”

하고 자면서 소리쳤지.

  꿈속에서 뭔가 피터 팬이 도와주러 왔거나, 나쁜 후크 선장을 물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보물섬을 쓴 로버트 스티븐슨이 말했지. 우리는 언제나 어린 시절에 본거지를 마련해두고 가끔 거기를 왔다 갔다 한다고. 그게 어른이 되었다고 지이킬과 하이드로 바뀌어서는 안 되겠지.

  내가 못다 이룬 꿈을 무엇일까?

  그것은 놓친 안타까운 그 무언가를 나날이 찾아 헤매는 것이겠지만, 내가 나이 쉰이 되어서 못다 이룬 꿈은 돈뿐이다.

  본디 가르치는 것보다는 글을 쓰고자 했으니 됐고, 진짜 교수가 되었더라면 돈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었을 것이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는 것이 그에게 보람차다면, 아니 나날이 일하는 게 즐겁다면 그건 괜찮은 자리다.

  그러나 그게 날이 갈수록 그게 그거고, 일하는 재미도 없다면, 난 그가 좀 더 일찍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일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힘이 있는 자리만 꿰찬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은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도 보람차고 재미있는 일이 아니면 그리 오래 즐겁게 가지는 못한다.

  일렁이는 물결일 수는 있다. 하지만 큰 강물이나 바다가 되지 않는 한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일렁이는 물결일도 되고 싶다면 먼저 큰 강물이나 바다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바닷가 될 수가 없으니 샘물이 되고 냇물이 되어 흘러야겠군.”

  그가 말했다.

  “그렇소, 그렇게 흘러가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죠.”

내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네요?”

그가 어느새 말을 높이며 물었다.

  “그렇다. 적어도 한 쉰 살은, 아니 한 50년은 되어야지.”

  내 말에 그가 입을 삐죽거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어쩌겠는가, 나도 스물 살 때는 뭐든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당신은 나이가 나보다 적어 보이는군요.”

  “네. 올해 딱 마흔입니다.”

  “난, 딱 쉰이요.”

  “우리 나이로요?”

  “네.”

  “당신도 우리 나이로 딱 마흔이겠지요?”

  “네.”

  둘은 잠깐 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다음 말을 하기가 쑥스러웠다.

  “당신은 언제부터 삶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했나요?”

  “글쎄요, 딱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한 서른부터? 아니, 마흔부터?”

  “에이-.”

  그가 대번에 비아냥거리고 나왔다.

  “그럼 아직 깨친 것도 아니네.”

  자식이 슬슬 말까지 놓았다.

  “야, 이 놈아, 한 서른이 되서 애라도 낳아봐야 뭘 알지!”

  내 말에 녀석이 움찔했다.

  “그래, 당신은 짝짓기를 했소?”

  “짝을 찾기는 찾았지만 달아났는데요?”

  녀석이 마치 나에게 대들기라도 하듯 팍팍하게 말했다.

  “그럼 애도 낳아봤겠네?”

  “네.”
  녀석이 이번에는 왠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은 잘 크고 있는가?”

  “그저 그렇죠, 뭐.”

  녀석이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 했다.

  “난 서른이 되고 아이를 낳고, 강물이 되었소.”

  내 말에 녀석이 날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크면서 마흔이 되었고, 삶의 쓴맛을 다 보며 쉰이 되었지.”

  “그 쓴맛이라는 게 깨달음이군요?”

  녀석이 눈이 빛났다.

  “그런 것 같소.”

  “에이-.”

  녀석은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그랬다.

  “당신은 된장인지 똥인지 꼭 먹어봐야 아오?”

  내 말에 녀석이 다시 어찌할 바를 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쓴맛이라는 것을 저에게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럼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면 너에게 하지, 너 말고 또 누가 여기에 있느냐?”

  “네?”

  “나라는 것, 저라는 것 그치를 모두 버려라. 네 마음속에는 오로지 네뿐이로구나. 그것이 가득 차 있는데 어찌 냇물에 가라앉지 않겠느냐!”

  “나를 버리라는 것입니까?”

  “그래, 바다가 될 때까지. 그렇지 않고서는 무거워서 강물에 뜰 수도 없느니라.”

  옆에 목탁이라도 있으면 녀석은 땀을 흘리며 칠 것 같았다.

  아아.

  녀석은 마음속으로 뭔가 깨닫고 있었다.

  “폭포가가 되면 모든 것이 떨어지지.”

  난 그렇게 말을 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폭포, 차가운 물, 소용돌이, 난 거기서 헤쳐 나오는데 참 오래 걸렸다. 못 헤쳐 나올 수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며 난 가장자리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큰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바다는 아직 멀었나요?”

  그가 또 물었다.

  “야, 저기 보이네.”

  난 정말 저기 바다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멀리 손짓을 했다.

  “에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녀석은 진짜 바다가 보이지 않자 짜증을 냈다.

  왜 새벽녘에는 못다 한 꿈을 꿀까?

  그게 못다 이룬 꿈이라면 차라리 아름답기나 하겠건만, 삶이란 그렇게 보드라운 것이 아니라서 때로는 거친 꿈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그 못다 한 꿈도 바다가 되면 사라진다.

  나는 정말 큰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가고 있는 것일까?

  포구가 멀지 않았고, 바다 냄새도 실려 오니 이제 바다가 끝인지 강물이 끝인지 모를 곳에 이르렀다. 질퍽한 곳, 갯벌도 되기 전에 진흙 같은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는 곳에 온 것이다. 거기에 해가 지고 저녁노을이 비치면 난 흘러온 길을 되돌아보겠지.

  내가 온 곳은 어디일까?

  끊임없이 은빛 강물은 햇살을 반짝이는데, 바람은 물결을 실어온다.

  “감미로운 데가 있군요.”

  “그건 거친 폭포를 지나, 다시 메마른 땅을 훑고 지나왔기 때문이지.”

  “?”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혼자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메마른 땅을 딛고 서 있었지, 오랫동안. 그러자 어디선가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고, 난 더 버티었지. 마침내 빗방울 뚝뚝 떨어지고, 난 흘러가는 강물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

  “그럼 그때는 아직 큰 강물이 된 게 아니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내가 언제쯤 큰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걸 잘 알 수가 없었다.

  마른 땅바닥까지는 생각이 잘 나는데, 언제 큰 강물을 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강물이 실어다 나른 모래와 흙이 쌓인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이른 걸 보면 난 분명히 저 큰 강물을 따라 흘러온 것이다.

  그게 언제쯤일까?

  나도 모르게 실려 다니고 실려 오게 되었다?

  살다보니까?

  부지런히 살다보니까?

  샘솟던 맑고 차가운 샘물과 냇물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떨쳐버리던 폭포와 메마른 땅을 훑고 지나와서?

  그 모든 삶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강물이 되어 흘렀단 말인가?

  그래,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 그거다.

  새벽꿈은 못다 한 꿈을 꾸게 한다.

  그게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다 삶이다. 다 거친 삶의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에게는 아이에게 맞는 꿈을 꾸게 하고, 어른은 못다 한 꿈을 꾼다.

  나는 꼭 날이 샐 무렵에 꿈을 꾼다.

  하지만 꿈마저 떨쳐버리고 일어나야 할 때가 있다.

  그게 나쁜 꿈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꿈을 나를 바다로 이끌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바다로 가기 위해 꿈마저 떨쳐버리며 일어난다. 그게 바다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시험을 치르듯 이야기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도 이제는 퍽 늙어 보였다.

  “네, 그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난 이제 마흔이 된 그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음속보다 더 넓은 곳이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보다 더 넓은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죠.”

  내 말에 그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그 세상이란 말을 바다와 바꾸어도 될까요?”

  “세상이 곧 바다가 아니겠어요? 삶은 고통스러운 바다(고해)를 건너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괴로움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 바다를 알면, 그 바다에 이르면 괴로움도 강물에 싣고 온 모래와 흙처럼 놓을 줄 알게 되겠지요.”

  “아아.”

  그는 뭔가 괴로운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그게 다 새벽녘 꿈과 같은 것입니까?”

  “때로는 같고 때로는 다릅니다. 나도 바다가 되어보면 더 잘 알겠지요, 꿈과 바다가 같은지, 다른지.”

  이제 해는 지고 바다에도 어둠이 찾아들었다.

  바다 위에도 별과 달이 뜨고 바람이 분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바다에도 파도가 치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면 물이 가장 많이 차게 되죠.”

  “그렇다면 보름달과 파도는 둘 다 일렁이는 물결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난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걸 저에게 물었나요?”

  난 그에게 되물어보았다.

  “저는 몰라서-.”

  “저도 그건 모르겠군요. 하지만 달이 밀물과 썰물을 만드니 물결이 이는 것이겠죠. 하지만 당신이 묻는 건 그것만은 아닌 것 같군요.”

  “네. 세상은 뭔가 더 얽히고설킨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걸 잘 풀어야 할 텐데.”

  “때로는 나 혼자면 풀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섞이면 그만 다시 엉키고 말아요. 그걸 힘으로 억지로 풀려 하면 끊기고.”

  “끊었다 이으면 매듭이 생기겠죠. 때로는 끊지 않으면 더 엉키고.”

  “아, 그럼 말이에요, 나쁜 인연은 끊어버리고 새 줄로 매듭을 잇고, 얽혔던 좋은 인연은 끊고 다시 그 줄에 묶으면 되겠네요.”

   “관세음보살.”

  난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얽혔을 때 끊어야 할까?

  어찌 되었던 많이 꼬이고 얽히기 전에 끊는 게 좋다. 그렇게 하려면 늘 바짝 마음자리를 잘 잡고 있어야 한다. 그게 어려운 것이다. 정말 그게 어려운 일이다. 잠깐이라도 마음자리를 놓았다간 일이 꼬이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나는 그래서 새벽에 못다 이룬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팽팽히 당겨진 실타래 하나 잇고 끊는데도 마음이 쓰이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오죽 하겠느냐?’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방충망은 찢어지고 난 그걸 바늘로 꿰매고 테이프로 붙이고 빨간 줄을 둘렀다.

  ‘그래, 다 내 탓이다.’

  그래서 난 더 외롭게 나와 식구들을 지켜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난 아무 것도, 강물도 바다도 아니었다.

  썩지나 말았으면 다시 냇물이 되어 흘러보리라.

  억지를 부리며 세상을 바로잡아보려고 글을 쓴다고? 제 하나도 바로 못 잡으면서? 떨쳐버릴 것은 떨쳐버려야지.

  어제 새벽꿈은 좋지 않았다.

  난 어머니가 어떤가 싶어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고춧가루 부쳐주마.”

  “다른 건 제발 부치지 마세요.”

  “알았다, 싸우지 마라.”

  “네.”

  내일 새벽에는 못다 이룬 꿈이라도 꿀까?

                            - 끝 -   2009/9/7 

2009/8/29

          고수머리

                                             김    영 관 (소설가)

  무얼 자꾸 새로운 걸 추구하려는 것은 예술의 본능일 것이다.

  물건이나 사람은 새로운 것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술은 좀 다르다.

  뭔가 색다른 걸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술적인 것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피리를 잘 불어도 예술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건 뭔가 사람과 피리가 하나로 묶어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의 얼굴에서는 예술적 냄새라기보다 빛이 느껴졌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고집스럽게 박힌 광대뼈와 조금 비뚤어진 코, 고집 센 입술, 울퉁불퉁한 이마와 주름살이 날카로운 눈과 그런 대로 어울려 있는데, 한번씩 나를 보거나, 어디 먼 곳을 바라볼 때마다 쏘아보는 듯한 그 눈빛이 그를 예술적이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이 맑고 크고 잘 생겼는가?

  한마디로 아니다.

  어떨 때는 동태 눈깔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독이 오른 빨간 개 눈깔 같기도 한데, 다만 눈빛이 아주 날카롭다.

  그것 말고 그의 모습에서 예술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인데 그게 또 곱슬머리라면 어떻겠는가?

  그는 그 머리카락을 넉 달에 한번 자른다.

  그러니까 1년에 세 번 이발소에 가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어떻게 자르실 거예요?”

  “음, 옆머리와 뒷머리를 여기까지 깎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은 거의 머리 꼭대기에 와 있다.

  “네? 그렇게 짧게요? 고수머리로 말이죠?”

  고수머리라니?

  곱슬머리를 고수머리라고 한다.

  “아니, 옆과 뒤 머리카락은 많이 깎고 위와 앞은 조금 남겨두세요.”

  “그게 고수머리죠”

  여자가 은근히 고집이 세게 생겼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는 여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눈을 감았다.

  여자가 시키는 대로 잘도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든다.

  아니, 여자가,

  “고개 조그만 숙이세요.”

하고 말이라도 하면 고개를 너무 푹 숙여서, 여자가,

  “아니, 조금만 숙이세요.”

하고 또 말했다.

  쓱싹쓱싹.

  머리가 시원한지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아마 머리를 다 깎을 때까지 그는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적으로 머리를 기른다기보다는 귀찮아서 안 깎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어떻게 깎여도 괜찮다는 것이다.

  ‘오죽 알아서 잘 깎을까?’

  그는 그 고수머리 한마디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는 고수머리란 가운데가 수북이 높은 머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 됐습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에 붙어 있었다.

  “잠깐만요.”

  여자가 어디서 진공청소기를 가져와서 얼굴과 머리에 대고 남은 머리카락을 휙 빨아들인다. 그는 그것도 시원한지 또 눈을 감는다. 글을 쓰는 것은 사람 머리를 지치게 하고 그건 온몸을 지치게 만든다.

  여자가 말하는 가운데가 수북이 높은 <고수머리>가 거울에 비쳤다.

  그는 또 그걸 보고 씩 웃었다.

  그건 머리카락이 잘 깎였다는 것인지, 머리를 많이 깎아서 시원하다는 것인지, 깎고 보니 얼굴이 그런대로 잘 생겼다는 것인지, 그만 알지 그걸 누가 알겠는가?

  “머리 감고 가실 거죠?”

  여자의 말에 그는 당연한 걸 왜 묻는지 이해가 안 간다.

  머리를 깎고 머리도 안 감고 가는 놈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아니, 그런 놈들이 있기나 한 건지 그는 또 괜히 머리를 굴린다.

  고수머리는 누가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걸 싫어하지만 머리를 주무른다거나 대놓고 만지면 또 달라진다. 머리를 잘 안 만지기 때문에 대놓고 주무르면 시원한 한 것이다.

  “얼마죠?”

  “6000원입니다.”

  ‘전보다 1000원이 올랐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발소를 나와 기분 좋게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전철 역 쪽으로 또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아래쪽 네거리에서 또 무슨 공사를 한다고 그런 것 같았는데, 길이 편하게 뚫리라고 한다지만 그가 보기에는 괜히 건드려서 탈인 것 같았다. 거기는  아침저녁으로만 잠깐 길이 막히는 곳인데 이건 공사를 하고부터는 벌써 며칠째 길이 온통 꽉 막혀 시끄럽고 공기도 안 좋아서 짜증이 났다.

  ‘예술적인 사람은 저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씩 웃었는데,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휙 불어와 그의 고수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의 말은 머리가 나쁘거나 예술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윗대가리에 앉아 온통 이건 이렇게 하라, 저건 저렇게 하라고 하니 길이 꽉 막힌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당신은 누구요?”

  그가 물었다.

  “예, 전 이 동네에 사는 소설가 홍길동입니다.”

  “아하. 여기서 뵙다니.”

  고수머리는 마치 날 알고나 있다는 듯이 자기도 소설을 쓴다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은 찬데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난 선생의 이름을 들어봤어요.”

  고수머리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요, 어디서?”

  “얼마 전에도 책을 내섰죠? 그 3000원짜리.”

  “하하. 예. 그걸 읽으셨군요.”

  나는 고맙다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참 재미있게 마음 가는 대로 쓰시더군요.”

  난 그렇게 말하는 고수머리의 머리털이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걸 보았다.

  “얼마나 돈이 없으면 3000원짜리 책을 펴냈겠어요?”

  나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난 그렇게 하지도 못해요.”

  그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졌다.

  그건 안타깝고 쓸쓸한 여운을 오래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자신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쓸쓸한 여운을 오래 남기거든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땅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해도 될까요?”

  “너무 지치셨군요.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합시다.”

  난 고수머리를 이끌고 생맥주 집으로 들어섰다. 

  “마음이나 머리가 텅 비어 있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그건 글이 잘 안 될 때가 있다는 말과는 다른 것 같군요.”

  “네.”

  우리 이야기는 그렇게 나아가다고 끊기고는 다시 나아갔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짜증나게 고치고 있다거나, 왠지 가슴이 답답할 때는 글이 잘 안되지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고수머리는 내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런데 짙은 슬픔이란 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난 아까 내가 느낀 걸 그에게 물어보았다.

  “글쎄요, 짙은 슬픔이라. 그 참 문학적인 말이군요.”

  고수머리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그건 어릴 때부터 타고난 게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고수머리는 김 따위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땅콩만 집어먹었다.

  “땅콩을 좀 더 시킬까요?”

  내가 물어보았다.

  “아니, 아니, 됐습니다.”

  난 그가 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여기 술값을 내가 냅니다.”

  “그럼 더 시키세요, 생맥주도 딱 한 잔만 더.”

  우리는 벌써 서너 잔의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게 아마 마지막 잔일 겁니다.”

  고수머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똑바로 앉았다.

  그는 좀처럼 취하지 않았다.

  “너무 취하면 글을 잘 쓸 수도, 잠을 잘 잘 수도 없습니다.”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붙은 낡은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수머리는 푸른 불이 들어오자 건널목을 건넜다.

  ‘예술도 익으려면 오래 기다려야지.’

  스물다섯부터 소설을 쓴다고 끌쩍거렸지만, 마음에 들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요 몇 년 동안이었다. 그의 나이 이미 쉰이었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전철 역 아래 네거리 공사 때문에 길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한동안 골치 아프겠군.’

  그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집이 있는 언덕 쪽으로 부리나케 걸었다.

  외눈 같은 반달이 하늘 한참 아래에 내려와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뒤늦게 그걸 보고는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인사를 하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싱긋이 웃었다.

  ‘매연 속에서도 언덕에는 달이 뜨고 별도 뜨는군.’

  그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보지 못하던 몇몇 별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소설을 하나 썼으니 내일은 무엇을 쓸까? 참 이제는 쓸 것도 없군.’

  그는 혼자 그렇게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쇠로 만든 달’도 썼고, ‘별’도 썼다.

  쓰지 않은 건 ‘하늘’쯤 될까?

  ‘하늘이야 늘 잘 쓰고 있는데 다짜고짜 또 하늘, 하고 쓰는 것도 찐 맛이 없을 테고.’

  밤바람이 확 짧아진 머리에 닿을 때마다 시원하다.

  하기야 넉 달이나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으니 그의 모습이 확 달라지긴 다라진 것이다. 그런 건 그의 성격 탓이지만 이발소에 가기 싫은 탓도 있다. 게을러서 그렇겠지만 돈도 시간도 아까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사는데 시달리고 잠이 쏟아지고 배를 곯으면 예술이고 나발이고 없지 않나요?”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그가 말했다.

  그는 그동안에 머리카락도 꽤 자라 있었는데, 겨울 찬 바람에 귀는 덜 시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생각이 바뀌었나요?”

  난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물어보았다.

  “날마다 사는 게 전쟁이죠, 뭐. 개새끼들.”

  그가 거칠게 말했다.

  몇 달 동안 한반도 깎지 않은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를 더 거칠게 보이게 했다.

  “우리가 지쳤을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게 예술이 아니었던가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건 밤에 보는 개 눈깔 같기도 했고, 더 날카로운 고양이 눈깔 같기도 했다.

  “내일은 머리를 좀 깎아야겠군요.”

  그가 고수머리를 긁어서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왜요, 보기 좋은데.”

  나는 괜히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뇨. 너무 취하면 글을 잘 쓸 수도, 잠을 잘 잘 수도 없는 것이죠.”

  그가 말을 이어갔다.

  “짙은 슬픔이란 통장에 돈이 10만원밖에 안 남았을 때, 아내가 어딘가에서 돈을 빌려야 할 때, 빠진 이빨을 해 넣지 못 할 때, 세금 독촉장이 날아들 때, 아내의 어린 눈물이 반짝일 때가 아닐까요?”

  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설마하니 내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려 땅바닥에 떨어지기야 하겠느냐.

  짙은 슬픔이란 아내의 어린 눈물이 반짝일 때?

  “술이라도 한 잠 하시겠어요?”

  난 자꾸 괜한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아뇨, 됐습니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만 했군요. 삶이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며칠 뒤, 난 머리를 깎은 그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아주 짧게 깎았던 그 <고수머리>가 아니었다.

  “삶도 예술도 익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그것과 이번에 좀 다르게 깎은 <고수머리>가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았지만,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무얼까, 그게?’

  정해진 운명?

  “삶과 예술이 익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쉰이면 꽤 익었겠죠?”

  내가 참다못해 그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그건 스물, 서른부터 익을 수도 있고, 마흔, 쉰부터 익을 수도 있고, 예순, 일흔이 되어도 익지 않을 수 있어요.”

  고수머리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왜 머리를 짧게 잘랐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 끝 -  2009/8/31

2009/8/4

         비행접시

                                         김    영 관 (소설가)

  비행접시가 왜 거기에 내렸는지 그건 모른다.

  다만 피뢰침이 뾰족하게 선 옥상에 어떻게 보면 얌전하게, 어떻게 보면 위험하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저녁 햇빛을 받아서인지 아주 느리게 빙글빙글 도는 둥근 윗대가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 비도 안 오고, 번개도 안 치고, 벼락도 안 때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난 피뢰침이 거슬렸다. 말이 비행접시지 어떻게 보면 버섯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굴뚝 같기도 해서 멋대가리는 없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모양만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누가 거기에 올라가 보겠나?’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벌써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는 원고를 부칠 돈도 없다.’

  그런데 비행접시는 하나가 아니었다.

  잘 보니까 건너편 아까 그 옥상 왼쪽으로도, 이번에는 아주 착륙장까지 있는 곳에 똑같은 비행접시가 얌전하게 앉아 있었는데, 왜 네모반듯한 착륙장에 앉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옥상 가장자리에 앉았는지 그것까지야 잘 모르겠지만, 하늘은 오늘따라 어찌 그리 예쁘고 새파란지, 새하얀 구름마다 물감처럼 조금씩 퍼진 자락은 아름다웠다.

  겨우 몇 층을 올라왔는데 염통이 욱신거린다.

  이래서는 안 되지.

  옥상까지는 아직 까마득했다.

  ‘자식들, 웬만하면 좀 내려오지.’

  난 비행접시에 누가 탔는지도 모른다.

  “겁도 없이 올라오는군.”

  접시 104가 접시 105에게 말했다.

  “자네 쪽으로 가고 있어. 뒤뚱거리는 게 재빠른 놈은 아니야.”

  ‘모두 내가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게지.’

  난 그때부터 이미 내 앞길이 정해져 있었던 게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혼자 앞길을 열어가야 하는데 그걸 언제 찾아내느냐가 어렵다. 달콤한 첫사랑의 입맞춤과 아이스크림과 커피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무얼 깨뜨리지만 않는다면, 깨뜨린다는 것은 그리 못된 짓은 아니다.

  그 뒤쪽 산에는 팔각정이 보였다.

  계단은 왼쪽 오른쪽으로 한번씩 굽어 있었는데 거의 다 올라왔을 무렵에는 하늘에 구름이 좀 끼어 있었다.

  ‘비행접시는 비행접시대로 살면 되고 난 나대로 살면 되는 게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비행접시는 은빛을 내며 파르르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104라고 쓰여 있어서, 오른쪽 옥상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비행접시 아래에는 105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 비행접시들은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작았다. 105호가 104호보다 좀 낡았지만 크기는 똑같았다.

  윙, 윙, 윙, 웅, 웅, 웅-.

  비행접시가 윗대가리는 마치 큰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소리를 냈지만 내가 도 손으로 꽉 잡으면 멈출 것같이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는데, 비행접시가 더 힘차게 돌았다.

  ‘음, 바람 힘으로 날아다니는군. 그래야 기름이 들지 않겠군.’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한발 두발 104 비행접시 쪽으로 다가갔는데 눈이 조금 부셨다.

  “안에 누구 있어요?”

  난 살살 말해보았다.

  “없어요.”

  난 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밑으로 들어오세요.”

  “밑에는 104라고만 쓰였고 들어갈 데가 없는데요?”

  “아이 거기 말고 가장 아래로 내려가서 들어오세요.”

  “?”

  난 104 비행접시 우주인이 장난친다고 생각했다.

  “여긴 조종석이라서 앉을 데가 없어요.”

  음.

  난 녀석이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럼 혼자서 그 먼 하늘을 날아왔나요?”

  “아뇨, 100명은 탓을 걸요?”

  난 녀석이 장난꾸러기라고 생각했다.

  “개새끼들!”

  난 순간 깜짝 놀랐다.

  그건 분명 비행접시 안에서 들여온 소리였기 때문이다.

  “성났어요?”

  “네.”

  “왜요?”

  “지구가 아주 덥고 더러워서요.”

  “더위를 많이 타나봐?”

  난 이쯤에서 슬슬 말을 놓았다.

  “오존층이 뻥 뚫려 있더군요. 아니, 그것보다 내 참 더러워서, 큰 국제공황에는 착륙도 못하게 하니 말이에요.”      

  “비행접시라서 그렇겠지.”

  “아뇨, 비싼 비행접시라면 내리라고 했을 거예요.”

  음.

난 알 만했다.

  “그래서 여기 옥상에 내린 거군.”

  “네? 옥상이라뇨?”

  “아냐, 아냐, 아무 것도.”

  나는 한자말 옥상이란 말 말고, 지붕이라는 말을 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두었다.

  “그래, 105 비행접시는 친군가?”

  “벗이죠.”

  난 녀석이 우리말을 곧잘 한다는 생각이 들어 좀 머쓱해졌다.

  “그래, 어느 별에서 왔지?”

  “그린 스타.”

  “야, 이 놈아, 푸른 별이라 하면 되지 꼭 그렇게 영어를 써야 하나, 응!”

난 이때다 싶어 따끔하게 나무랐다.

  그러자 안에 들어 있던 우주인도 젊은 놈인지 이 <나무라다>라는 마을 못 참고 뚜껑을 열고 튀어나왔다.

생긴 것 꼭 쥐새끼 같은 놈이었다.

  “한국을 우리 별에서는 코리아라고 하니까, 푸른 별도 그린 스타가 되는데 왜 그러세요.”

  녀석이 이제 따지기까지 했다.

  “그래, 좋아, 그린 스타라고 해두지. 그래, 그게 어디 있는데?”

  녀석이 쥐처럼 생겨 아무래도 난 기분이 나빴다.

  “은하수가 있는 곳이죠.”

  난 어디 은하수가 한두 개냐, 하고 말하려다 귀찮아서 관두었다.

  “그런데 왜 왔어?”

  “그린 스타에 비가 내리지 않아요. 몹시 메말라버렸죠.”

  “아까는 지구가 덥니, 더러우니 하더니만, 쯧쯧.”

  내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는데 이 쥐새끼 같은 놈은 또 그런 걸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네 몇 살이야?”

  “나이야 숫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 이 놈아, 그건 어르신들이 할 말이지 네가 할 말이 아니야, 아이고 속 터져.”

하며 내가 내 가슴을 몇 번 쳤는데, 이게 그린 스타에서 온 녀석에게는 처음 보는 몸짓인지, 아니면 본디 되바라져서 그런지 얼굴빛이 안 좋았다.

  “그래 그 숫자가 얼마야?”

  녀석은 말로 하면 될 텐데 자기가 타고 온 비행접시를 가리켰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설마 104살?”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몇 살이세요?”

난 쉰둘이라는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딱 녀석의 반이었다.

  “너희 나라는 대게 몇 살까지 살지?”

  내가 슬쩍 물었다.

  “200살.”

  “그럼 나하고 똑같네, 지구에서는 대게 100살까지 사니까.”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네가 어려보이니까 말은 놓겠다.”

  난 좀 억지를 부렸다(그래야 글을 쓰는데 낫다).

  “그럼 저쪽 벗은 105살이겠네?”

  내가 묻는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좀 못마땅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였다.

  “그래, 언제 떠나나?”

  “앞으로 줄곧 여기서 살 겁니다.”

  “뭐라고!”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왜 안 떠나겠다는 건가?”

  “아까 말했잖아요. 그린 스타가 너무 메말라버렸다고요.”

  “사람이, 아니 우주인이 못 살 만큼?”

  “참, 이 아저씨 깐깐하시네, 그렇다니까요.”

  말라비틀어진 쥐새끼 같은 몰골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언제까지 살 건가?”

  “아이, 짜증나.”

  녀석이 발랑 까진 말은 잘도 했다.

  하늘이 비라도 뿌리려는지 아까보다 더 흐려지자 105 비행접시 쪽 피뢰침이 잘 안 보였다.

  “여기는 피뢰침이 없는데 비가 오면 위험하지 않을까?”

  난 좀 딴 말을 했다.

  “괜찮겠죠, 뭐.”

  “네 이름은 뭐지?”

  “그린.”

  “그럼 105호는 스타군.”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녀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뭐 별 거 아니야.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런데 저쪽 벗 스타는 사람이, 아니 우주인이 참 조용하군. 웬만하면 이리로 건너오라고 해.”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자기 뜻이 아니면 누굴 오라, 가라 못해요. 자기 뜻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는 거죠.”

  “참, 자식들, 깐깐하네.”

난 아까 녀석한테 당한 대로 되갚아주었다.

  “오늘 밤에 한바탕 퍼붓겠는 걸.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나봐.”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녀석이,

  “태풍이라고요?”

하고 묻는 게 아닌가.

  “그래, 태풍, 바다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같은 거 몰라?”

  난 되는 대로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그린 스타에는 바다가 없어요. 강으로 흐르던 물은 모두 말라버렸죠.”

  난 그 말에 어찌 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별에도 옛날에는 은하수 같은 바다가 있었다고 해요.”

  “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녀석의 말로는 104호 비행접시에는 100명의 우주인이, 105호에는 200명의 우주인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럼 왜 다른 곳에 안 가고 어찌하여 지구로 왔나?”

  “지구도 푸른 별이니까요.”

  녀석은 이때만은 그린 스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 집에만, 아니 비행접시 안에만 들어앉아 있나?”

  내가 좀 갑갑해서 물어보았다.

  “아뇨,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밤에는 곧잘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하나 둘씩 모두 마음을 다쳐서 들어왔더군요, 지구는 덥고 더럽고 무서운 곳이라면서.”

  “이봐, 자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구에는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난 그렇게 말해놓고 녀석에게 구더기와 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때서야 녀석이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일은 모두 다 밖으로 나오라 해야겠군요. 아, 그런데 우리 얼굴은 어떡하죠? 아아.”

  녀석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은 바뀌게 되어 있어. 옆으로 쪽 째진 쥐새끼 같은 자네들 얼굴도 바뀌어갈 걸세.”

  “하지만, 우린 이제 또 다른 푸른 별을 찾아 떠날지 몰라요-.”

  “너무 괴로워 말고, 그린 스타에서 하듯이, 자네 뜻대로 하게. 이 지구에도 못된 놈들이 아직 많으니까.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여기 피뢰침이나 세우는 일이나 해볼까? 부지런히 일을 하면 다 잊고 잘되게 되어 있지.”

  나는 녀석이 밑으로 내려가더니 어디선가에서 가지고온 긴 쇠막대를 105 비행접시가 있는 지붕처럼 같은 곳에 꽂았다. 그러자 곧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르릉, 쾅쾅!

  밤이 되자 비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와 치기 시작했다.

  벌써 몇 십번이나 번개가 번쩍거리더니 귀를 찢는 천둥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벼락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접시는 괜찮을까?

  난 아까 우주인 녀석과 세운 피뢰침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밤새 태풍이 동해로 빠져나갔는지 그렇게 불어대던 비바람도 그치고, 다음날 아침에는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했다. 아니, 다른 날보다 더 눈이 시리게 맑고 푸르렀다.

  나는 서둘러 어제 그 계단을 밟고 다시 비행접시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아저씨, 지금 어디 가세요?”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뒤를 돌아보니 그린 스타라고 쓰인 파란 제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아, 예. 이 지붕에, 아니 옥상에 비행접시가 두 대나 앉아 있어서요.”

  “네? 이리 내려와 보세요.”

  그의 얼굴도 왠지 쥐를 닮은 것 같아 내가 물었다.

  “그린 스타에 사셨어요?”

  “예? 살았냐고요? 네, 참, 전 여기 안 살아요.”

  “그럼?”

  “저기, 저, 다른 아파트에 살아요.”

  “아파트라뇨? 그럼 여기는 왜 왔나요?”
  “네, 참. 여기 경비니까 왔지, 왜 오긴, 네, 참. 그런데 그린 스타에 사시오?”

  “아뇨.”

  “그럼 여기는 왜 왔어요?”

  경비는 이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비행접시 두 대가 어제 저 지붕 위에 있었단 말이에요. 내가 비행접시 104호 우주인과 피뢰침까지 박은 걸요.”

  날 미친놈쯤으로 여기는지 경비는 이동전화로 다른 경비에게 내 이야기와,  어제 벼락에 피뢰침이 맞아 조각이 떨어진 이야기를 하면서 빨리 104동 밑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왠지 비행접시 104호와 105호가, 앞으로 이 지구라는 푸른 별을 떠나지 않고 잘 헤쳐 나갈 것만 같았다.

                            - 끝 - 2009/8/6

2009/8/13

          퇴직금

                                          김   영 관 (소설가)

  “선생님 퇴직금은 55만원입니다.”

  “네? 에이, 설마, 550만원이겠죠.”

  “한 달에 55만원씩 받고 1년 일하셨죠?”

  “네.”

  “그러니까 55만원입니다.”

  난 처음에는 퇴직금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다섯 사람 이상인 곳에서 1년 이상 일하면 퇴직금이 있다는 걸 알고 퇴직금 안 들어왔다고 전화를 했더니 벌써 몇 년 전에 55만원을 넣었다는 것이다.

  난 통장을 찾아보았지만 몇 년 전 통장은 새 것으로 바뀌고 없었다.

  “은행에 가면 알아봐줄 겁니다.”

전화는 그렇게 나에게 또 이야기했다.

  ‘들어왔겠지?’

  난 아직까지 은행에 가지 않았다.

  내가 55만원을 받을 때 아내는 좋아했다.

  왜냐하면 직장의료보험증도 새로 나오고, 방학에도 한 50만원 나왔기 때문이다. 시간강사는 방학 넉 달 동안 때 돈이 안 나오지만, 대우교수는 대우를 해주는지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한 대학에서는 대우교수로 55만원을 받았고, 다른 대학에서는 시간강사로 45만원을 받았지만. 거기는 방학에 돈이 안 나오니까, 난 1년에 1000만원도 못 벌었던 것이고, 그래서 남는 시간에 울분을 달래느라고 글을 더 썼던 것이다.

  ‘은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은행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은 버트란드 럿셀이지만, 돈을 거기로 때려 넣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찾으러 가야 한다.

  돈은 은행에서 돌고 돈다.

  내 주머니에서는 모래알이 돌고 돈다.

  접수하신 외래 강사 자리는 8월 14일 금요일까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제 어느 대학에서 전자우편이 왔다.

  외래 강사란 다른 곳에서 오는 시간 강사를 말한다.

  어제는 8월 12일 수요일, 오늘은 8월 13일 목요일, 내일은 8월 14일 금요일이니까 난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셨지만, 부득이 한 분밖에 모실 수 없어 최종적으로 결정된 분께만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 연락이 올까?

  기다리는 힘이고, 힘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다.

  내가 거기서 10년을 일했다면 난 550만원을 받았을 것이다.

  무얼 기다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래도 좋은 것을 기다리지, 나쁜 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면 기다리지 않게 된 사람은 이제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다 제 갈 길로 잘 갈 것이다.

  난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더 큰 것을 하려는 사람은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사자나 범을 잡으려는 사람은 여우나 토끼를 잡지 않는다는 말?”
  “네.”

  “그걸 어디에서 들었어요?”

  “라디오.”

  난 동전을 맞추며 은행 의자에 앉아 있었다.

  31680원.

  난 늘 680원을 100원짜리와 10원짜리로 맞추어 거지고 와서는 은행에서 기다리는 동안 다시 세곤 했다.

  “자동 이체를 하시죠?”

  “못 믿어요.”

  “네? 왜요?”

  여자 직원이 눈을 빤히 뜨고 웃었다.

  난 러셀을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그냥요.”

  “꼭 맞추어 가지고 오셨네요.”

  “네.”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여기가 가장 싹싹한 데다.

  그런데 난 이번 달에는 그 31680원을 내지 못했다. 돈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는 또 얼마나 보드라운지 다음 달에 63360원만 내면 되도록 되어 있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 다음 달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그건 꼭 올 것이다.

  ‘퇴직금 55만원은 잘 들어왔을까?’

  한 푼이 아쉬운 때다.

  돈은 못 벌지만 글쟁이는 퇴직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집에서 혼자 들어앉아 글만 쓰면 된다.

  “돈은 누가 벌고?”

  글쟁이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방학이 끝나면 학교에 나가게 됩니다.”

  ‘얼마나 벌까? 많이 벌었으면 좋겠는데.’

  “그 학교에 성실의 문, 정직의 문, 희망의 문이 구름다리처럼 만들어져 있어요.”

  “대학이라고 하지 않았나?”

  “학교는 그게 그겁니다. 아, 참. 글쟁이도 퇴직금이 없죠?”

  “자기 집에서 일하는데 집에서 돈 주나?”

  난 그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뙤약볕 아래 인도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사람이 밀짚모자를 쓰고 참새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달구어진 인도 위를 걷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는데 그 사람은 어땠을까? 같이 일하러 나온 사람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숲에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사람처럼 왜 돈을 벌지 못했을까?

  그는 왜 나처럼 돈을 벌지 못했을까?

  게을러서?

  운이 없어서?

  쫓겨나서?

  적이 먼저 알아봤기 때문에?

  그럼 왜 나는 그런 눈치를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비는 가난한 티를 내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혼자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 강의를 더 많이 한다.

  2. 정말 대우를 받는 교수가 된다.

  3. 차라리 대학을 하나 만들어본다.

  4. 더 곰곰이 생각해본다.

  5. 선비는 가난한 티를 내지 않는다.

  아내는 1번을 골랐고, 아이들은 2번을 골랐으면, 나는 속 편한 5번을 골랐다. 3번고 4번은 어느 공상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 공상이 소설 쓰기에는 딱 좋아요.” 

  글쟁이는 공상가를 감싸고 나왔다.

  “우리 셋은 퇴직금이 없다는 게 똑같네요.”

  “늘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도 똑같죠.”

  우리들은 저마다 품고 있던 생각들을 늘어놓았다.

  “그게 잘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공상가가 말했다.

  “난 그걸 글로 쓴다오.”

  글쟁이는 좀 으스대며 말했다.

  “그럼 재미있겠네요?”

  “그렇소. 그런데 당신 얼굴은 재미가 없어 보이는구려.”

  “돈을 못 벌어서 그래요.”

  “그래도 재미나게는 살아야지.”

  “속 편한 소리군요.”

  “공상을 글로 쓴다는 것은 무얼 자꾸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죠. 그러니 즐겁지 않겠어요?”

  하지만 공상에만 머무는 공상가는 머리를 쥐어짰다.

  “나도 젊었을 때는 멋모르고 그랬죠. 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썼지만 참 즐겁지는 않았죠. 하지만 거친 삶 속에서도 자기를 지켜나갔다는 것!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글이 하나 둘 잘 쓰이더군요. 자신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남자는 기가 잘 흘려야 되고, 여자는 피가 잘 흘러야 된다는 한방의 원리와 같군요. 그런데 기가 앞서는 사람은 밥맛이 없고, 피가 잘 흐르는 사람은 밥맛이 있다고 하던데요?”

난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기가 잘 흐르면 피가 잘 흐르고, 피가 잘 흐르면 기가 잘 흐르는 것 아닐까요?”

  글쟁이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공상가는 딴 생각만 하고 있어서인지,

  “당신은 기도 피도 다 잘 흐르지 않을 것 같군요.”

하고 다시 한마디 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공상가는 괴로운지 다시 머리를 감쌌다.

  “그건 아직 당신이 젊어서 그래요. 자전거라도 타고 한강을 신나게 달려보세요. 그렇게 몇 년을 달리다보면 몸도 마음도 더 커져 자신이 생길 것입니다.”

  공상가는 이제 막 서른이 된 듯이 보였다.

  글쟁이는 이미 쉰을 넘었고, 난 마흔 여덟이었다.

  “집에서 글만 쓴다면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네요? 그런데, 책도 안 팔린다면서 어떻게 살아요?”

  “사람들이 사는 삶 속을 걸어 다니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오. 그쯤은 아실 텐데? 다, 먹고 사는 수가 있어요.”

  며칠 째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오늘이 그 금요일이었지만 아침 내내 기다리다 못해 나는 막걸리라도 사러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집밖으로 나오니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이마에 땀이 맺혔다.

  멀리 달아오른 인도 저쪽에 또 누가 앉아 있는데, 먼 쪽은 파랗고, 가까운 쪽은 땡볕에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며칠 전 바로 그 사람이 풀을 뽑아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곁을 될 수 있으면 빨리 지나가려 했다.

  뭔가 그에게 미안했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대 멀리서 자전거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왔고 난 그것을 피하려 풀을 뽑는 사람 손 쪽으로 발을 디디고 말았다.

  “어어, 조심하셔야지?”

  그가 밀짚모자를 조금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몹시 타서 거의 흰 눈동자만 보였는데, 그가 나를 보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곤 웃으며,

  “아휴, 안녕하시오? 날 모르겠소?”

하는 게 아닌가!

  바로 그 글쟁이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달래며 말했다.  

  “이렇게 사시는군요.”

  “예, 다들 힘들게 살죠.”

  그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목에 건 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늘에서 쉬는 것 같던데?‘

  난 그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개미와 베짱이 몰라요?.”

  “예? 하하.”

  나는 막걸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아직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하는 그에게 한 병을 주었다. 그의 목덜미는 하도 새까맣게 타서 오히려 벌겋게 민둥민둥했다.

  ‘글은 저기에서 나오는 거다.’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삶 속에서 뒹굴지 않으면 살아 있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힘도 그 속에 있고, 글도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이 빠진 공상가는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그가 젊었을 때 그러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그는 그렇게 살아간다.

  8월 14일 금요일 저녁이 다 되어도 온다던 일자리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난 눈을 감고 베짱이 선비를 떠 올렸다.

  춥고 배고파지면 개미를 찾아가던 베짱이는 한여름을 그늘 속에서 보냈다. 개미 앞에서 가난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개미를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난 베짱이가 아니니까.

  저녁이 되면서 뙤약볕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도 지금쯤은 어디에선가 그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게다.

  그는 밀짚모자를 쓰고 쪼그리고 앉은 참새를 닮았지, 개미를 떠올리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참새와 개미 사이를 지나 막걸리를 사러 갔던 것이다. 그들 눈에는 내가 베짱이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더위에 지친 나는 잠이 왔다.

  땡볕 아래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잠을 잘 수 없다.

  잠이 오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

  달아난 잠은 나중에 쏟아질 것이다.

  그가 개미처럼 일을 하고 쌓아놓은 것은 쌀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 끝 - 2009/8/15

       재수 좋은 놈

                                                    김 영 관 (소설가)

  되바라진 놈들은 되바라진 대로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자.

  나도 한때는 재수 없지 않았던가?

  불안정하게 걸으며 눈치를 살피지 않았던가?

  나는 되바라지지는 않았다. 불안하게 사람들 눈치를 보아야 했으니까.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지치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헤쳐 나아가야 한다.

  “그가 한때 재수 없는 놈이란 건 어떤 뜻이지요?”

  내가 먼저 물었다.

  “네. 그건 키 작은 곱슬머리에 다리까지 굽어 있으니 뒤뚱뒤뚱 불안하게 걸어왔다는 것이죠.”

  그녀가 말했다.  

  “그럼 요사이도 그런가요?”

  “왜요, 그랬으면 좋겠나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가 죽을 고생을 하며 몸과 마음이 진짜 아팠는데 그걸 다 겪어내고 나서는 아주 좋아졌어요. 몸도 마음도-.”

  “그렇다면 오래 걸렸다는 이야기인데?”

  “네. 한 10년?”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죽을 고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다른 나라에 갔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왔다는 둥, 일자리를 못 찾아 그랬다는 둥, 여러 소리가 많았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믿지 않았다. 

  “재수가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고, 복 없는 봉사는 괘문을 배워 놓으면 개좆부리 하는 놈도 없다는 말은 믿나요?”

  “글쎄요.”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여자가 개좆부리라는 것은?”

  “감기 말이에요.”

  나는 또 아차,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개좆부리가 감기라는 뜻이라니!

  “남자들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 하나만 생각하나보아요?”

  “그는 그렇지 않나요?”

  “아뇨, 그도 그래요. 하지만 그것과 재수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정말 그럴까요?”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이미 그와 산 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둘 다 나이도 마흔이 훨씬 넘었다.

  “그는 지금도 글을 쓰나요?”

  나도 갑자기 물어보았다.

  이렇게 그녀와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말투가 그녀를 닮아 갔다.

  “네, 잘 팔리지도 않지만.”

  난 그래서 그녀 말투가 그렇구나, 싶어 혼자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까부터 가만히 들어보니까 당신도 그 사람 이야기를 꽤나 알고 있군요.”

  난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모르는 척하고 속으로 꾹 참았다.

  “그는 작은 키에 곱슬머리지만 뱃심이 좋아 보이니 많은 여자들이 거기에 나가떨어진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사내다운 사내는 재수 없는 사람은 아니란 뜻이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는 여자들도 있죠, 나도 그렇고요.”

  난 이쯤에서 남의 아내와 뭐 이렇게 오래 말할 게 있느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때는 재수 없었다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몰랐기 때문이고, 내가 그때 어디쯤에 서 있는가, 무얼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풀린 건 이것저것 책을 읽으면서 결혼을 하고부터다. 난 그때 어떻게든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고, 사람 일 가운데 가장 크다는 혼인을 하고부터 먹고 살아가기 위해 바빠졌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는 더 바빠졌고, 나를 잊었으며 마침내 온갖 일들이-집안일과 바깥 일-버릇처럼 몸에 배게 되었다. 그냥 일하고 뛰고 걷다보니까 하늘은 푸르렀고, 나무 그늘은 시원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그런 걸 나름대로 이야기로 썼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각 없이 그냥 부지런하게 쓸고 쓰다보니까 난 어디서 무엇 하러 여기에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직 재수 좋은 놈이 된 건 아니지만, 하여튼 재수 없는 놈에서는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바로 그녀 말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일을 많이 하니까 몸이 다부져지고, 걷다가, 걷다가 지쳐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지쳐 다시 일을 하고 또 생각하다가 바람과 구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부터는 뱃심까지 좋아져서 웬만한 여자들은 길을 걸을 때 한번쯤 흘겨보지 않는 여자가 없게 되었다.

  젊어서부터 삶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이게 다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부지런히 쓰고 쓸고 잊고 지내다가, 요즘 들어 다시 생각하면서부터는 눈빛은 더 깊어지고 -내 아내 말로는 못되어졌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일부러 귀찮고 힘들어서 자주 지어 보이는 것이다- 생각은 단순해졌다. 재수가 좋든 나쁘든 내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도 글이 잘 팔리지 않고, 나도 그렇다는 것은 재수가 없는 것일까?

  둘 다 그럭저럭 살고 있지만, 사람이 재수 없는 놈에서 벗어난다는 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재수 없는 놈이 좍 깔린 세상에, 다른 사람들 재수 좋도록 글을 쓴다는 건 재수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다부져지고 뱃심이 좋아져 더 사내답게 된다는 것도 재수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 흘겨보던 여자들과 결혼했나요?”

  뒤늦게 결혼한 나에게 언젠가 그녀가 물었다.

  여자들은 누가 누구와 맺어졌느냐에 끌린다.

  그건 좋은 시를 찾기 위한 본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직 자기 테두리에서 덜 떨어졌다고 보면 맞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맞선을 보았죠.”

  “맞선이라.”

  그녀가 야릇하게 웃었다.

  “남편은 잘 계시나요?”

  그렇게 묻는 내 말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늘 그렇죠, 뭐.”

하고 말했다.

  난 이제 이 여자를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괜한 소리나 하다 헤어질 걸 왜 만난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이나 늘 싸우려는 사람이나 다 부지런히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아를 잊어버려 이제는 거의 생각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달랐다.

  아내와 남편이 이렇게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본디 남남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내도 이제는 날 보고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더군.”

  그는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헤어지면 되지.”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또 이런 내가 어디 가서 더 나은 여자를 만나겠어? 이게 다 돈을 못 벌어 그런 거니까.”

  나보다 몇 살이 많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이제는 좀 늙어 보였다.

  “쓸개 없는 곰이 어디 있겠어?”

  나는 그를 좀 달랜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는,

  “웅담 말이지?”

하며 나를 좀 매섭게 쏘아보면서 되물었다.

  “음,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고 한 말 말이야, 곰을 못 잡아서 그렇지 쓸개가 왜 없겠어. 우리에서 일부러 기른 것도 아니고.”

  내 말에 그가 다시 웃었다.

  “우리는 다 곰은 잡은 거잖아?”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럴 때 그의 눈빛은 깊은 우물을 닮아 있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가도 하하, 웃다가, 길바닥 세상에 짜증을 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 잔술에 목을 축이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글을 쓰는 날이 길어진 것이다.

  “자네를 만나니 뭔가 좀 트이는군. 하하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하지.”

  그래서 우리가 그날 찾은 곳은 허름한 동네 생맥주 집이었다.   

  “자네도 살기가 힘들 텐데?”

  그가 생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말했다.

  “음, 그래, 요즘은.”

  난 그렇게 말했지만 벌써 지난 몇 십 년 동안 익숙해져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몇 잔을 마시고 그만 가자고 할 즈음에, 그가 그의 아내를 전화로 불러내었다. 이런 것들이 난 그와 잘 맞지 않았다.

  난 주머니네 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덥다는 핑계로, 우리는 아까 그 생맥주 집보다 더 허름한 막걸리 집 바깥에 내놓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내를 한번 꼭 뵙고 싶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전보다 더 살이 붙어 있었다.

  “한번 사귀던 사내가 어떤 여자와 맺어졌는지 여자들은 알고 싶은 게지.”

  그가 술이 좀 취했는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나처럼 재수 없는 놈은 만나지 않았을 테고.”

  그는 그녀와 싸웠던 게 덜 풀렸는지, 그녀를 슬쩍 그녀를 쏘아보았다.

  난 이렇게 될 바에야, 아까 그냥 헤어졌어야 하는데 싶었다.

  하지만 난 이제 그녀에게 끌리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그건 벌써 몇 십 년 전 일이었고, 그때도 아무 일 없었으며, 그냥 한두 번 만나 차 한 잔하고 헤어졌을 뿐이다. 그것도 그 자리에 그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왔고, 얼마 뒤 나는 그녀와 만나지 않게 되었고, 그가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이다.

  “자네 그녀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나?”

  그가 막걸리를 조금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한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 걱정은 말게.”

  난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다부지지도 뱃심도 세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그녀를 이렇게 다시 만났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끌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세월의 무게는 무거운 것이며, 사람을 다르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마저도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어렵게 힘들게 하는 자리는 가지 않는 게 좋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은, 더 훌륭한 일은 있기 마련이며, 또 어떤 게 그런 것일까, 지금보다 정말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혼자가 되었지만, 식구들과 이야기한다거나, 글을 쓸 시간은 더 넉넉해졌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사랑도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또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젊어서 한때 그런 사랑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의 그런 나와 맺어진 아가씨는 지금의 아내다.

  그때의 그런 내가 뭔가 좋았기 때문에 맺어졌겠지, 싫었더라면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 여보?”

  “당신 돈이나 좀 더 벌어와.”

  “몸과 마음이 튼튼한 것이 바로 돈이라고 내가 말했지! 슬기로운 사람 말을 따르라고!”

  “입 다물어, 대갈통 한방 날리기 전에! 슬기롭기는 뭐가?”

  일하러 가는데 늦은 아내를 차에 태워주며, 목이 아프다고 기침을 자꾸 하는 아내를 내가 나무랐더니, 뒷자리에서 내 머리통을 보고 하는 소리다.

난 이렇게 판판이 아내에게 진다. 그러니 진짜 싸우다보면,

  “재수 없는 놈-.”

이라는 말이 안 나왔을 리도 없다.

  내 딴에는 슬기로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내 눈에는 아직 안 그런 것이다. 돈도 못 벌고 집 안에 처박혀 팔리지도 않는 글만 쓰는 남편을 어느 누가 슬기롭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요즘에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아내에게 통 못 들어보았다. 아내도 좀 슬기로워진 게 아닐까?

  “당신 맞선보고 내가 좋았지?”

  “아니, 권투 선수 같던데? 입은 툭 튀어나오고, 머리는 곱슬곱슬하고, 키는 작고.”

  ‘음, 그때 이미 아내는 내가 다부지고 뱃심 좋은 걸 알아본 거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도 뭐가 좋았기에 나와 맺으려 했겠지?”

하고 물어보았다.

  “아니, 맞선보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우스개 소리야, 참말이야?’

  나는 좀 헷갈렸다.

  하지만 헷갈리면 어때, 헷갈리면 헷갈리는 대로 살아야지, 다 따지고는 못 산다. 또 대들다가는 내가 질 게 뻔하다. 난 아내가 가끔 겁난다. 게다가 이기지도 못한다. 얼마나 거센지 모른다. 한때는 그걸 뿌리 뽑으려고 해보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사랑으로 모든 걸 이겨내야지.

  나는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는 50킬로였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지 1년에 1킬로씩 불더니 지금은 70킬로가 넘고 말았다. 그래서 뱃심도 더 두둑해지고, 그게 다 아내 덕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고, 아이들 안고 메고 업고 다니는 바람에 더 다부져진 것도, 아내와 아이들 덕이라고 생각하면 난 정말이지 재수 좋은 놈이다.

                             - 끝 - 2009/6/2

2009/1/20

      쇠로 만든 해

                                            김  영  관 (소설가)

  뭐를 하든 자꾸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나도 그렇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될 일을 서두르기 때문이 아닐까?

  강물이 풀리고 하늘은 새파란데도 예전처럼 나뭇가지 하나 풀잎 하나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예술도 꺾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용기는 더 생겼다는 것이다. 그건 나이 탓도 있을 게다. 벌써 마흔 아홉이 아닌가.

  녀석의 이름은 강빈이다. 빈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인가, 예술인가?

  들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당신을 무얼 고르겠는가?

  둘 다는 안 된다. 그건 욕심이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골랐고 녀석은 예술을 골랐다.

  “해가 빛을 잃고 있어. 많이 약해졌지?”

  그가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몹시 추운 게 햇빛이라도 따뜻하게 비친다면 훨씬 나을 텐데, 해는 구름 속에 가린 듯, 안 가린 듯 희멀끔하다.

  “해를 한 열 개쯤 만들어 봐. 그러면 구름 속에 들어가는 해가 있더라도, 나머지 안 들어가는 해는 밝을 것 아냐?”

  “그럼 타 죽을 텐데.”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럼 한 개만 더 만들면 안 될까? 세상이 너무 추워서 그래.”

  “하나만 더?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아니, 그럼 자네는 지금까지 한번도 해를 만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있지. 저 하늘에 있는 저 해처럼.”

  강빈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해를 가리켰다.

  해는 마치 안개에 잠긴 듯했다. 오랜만에 햇볕을 쬐러 나온 나는 영 못마땅했다.

  “이봐, 저 개 무슨 해야. 특히 이 놈의 도시에서는 높은 집들에 가려 해를 볼 수가 없어!”

  내가 녀석에게 짜증을 냈다.

  “자네가 좀 더 나돌아 다니면 될 게 아닌가?”

  “할 일도 없이 거리를 싸돌아다니라고? 그건 못할 일이지. 잔말 말고 해를 하나 더 만들어주게!”

  난 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녀석은 큰 용광로에 이것저것 버린 자전거부터 못 하나까지 있는 쇠라고는 모조리 때려 넣었다.

  징징, 부글부글.

  큰 용광로 안에서 쇳물 꿇는 소리가 들렸다.

  “이 해로는 1년밖에 버티지 못해. 그것도 이걸 하늘에 잘 띄웠을 경우에나 그렇지.”

  “그 해 크기가 얼마나 되나?”

  “이 용광로보다는 작지.”

  그는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것도 그렇겠다, 싶어 고개를 뒤로 재치며 큰 용광로는 쳐다보았다. 높이는 전봇대만 하고 크기는 유조차만 했다.

  “이걸 얼마나 끓이나?”

  “열흘 밤낮으로 녹이면 온도가 1만도까지 올라가지.”

  난 그렇게 높이까지 올라갈까, 싶었지만,

“그럼 저 해보다 더 뜨겁겠군.”

하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지만 곧 따뜻한 기운만 내뿜는다네.”

  “그런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 띄우나?”

  “그건 비밀일세. 아무나 해를 만들어 하늘에 띄운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아마 세상은 불길에 휩싸여 다 타고 말 걸?”

  “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강빈은 어디선가에서 또 쇠솥이며 쇠로 된 책상, 의자, 농, 컴퓨터까지 버쩍버쩍 들어 용광로에 던져 넣고 있었는데, 난 저렇게 작달막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싶어서, 혹시 그가 용광로에서 나온 해를 하늘에 그냥 집어던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 열흘 뒤에는 꼭 와서 봐야겠군. 그거 대단하겠는 걸!”

  “그때는 난 여기 없을 걸세. 자넨 그냥 하늘이나 쳐다보고 있는 게 나을 거야.”

  난 녀석이 돈만 잔뜩 받아놓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건 돈을 받았다고 아무한테나 만들어주는 해가 아니기 때문에 하여튼 그를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겨울 내내 몹시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나는 그와 용광로 옆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몸이 따뜻해지고 얼굴이 발개져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자넨 결혼은 했나?”

  “달님과 했지.”

  “뭐라고?”

  “달님.”

  난 녀석이 우스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렇겠군. 해를 만들다 달님과 결혼했다?”

  “그렇다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제 더 넣을 쇠붙이가 없자 용광로의 문을 닫아버렸다.

  “오늘은 이걸로 됐네. 하지만 열흘 동안 탈 쇠붙이는 더 구하러 다녀야 한다네.”

  난 그 열흘이 몹시 지루할 것 같았다.

  “자네는 그 열흘 동안?”

  오히려 심심해진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난 이 불도 지켜봐야 한다네. 꺼지지 않고 쇳물이 될 때까지.”

  그러다 얼마 안 있어, 밤이 되고 달이 솟았다.

  “나도 이젠 잠을 좀 자야겠는데, 자네도 그만 돌아가 보게.”

  난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설마 달님과 잠을 자는 건 아니겠지?”

하고 말해보려다 괜히 짓궂은 일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세. 내일 다시 와보고 싶네만, 나도 어떻게 될지는 몰라.”

  “그러지 말고 자네 일이나 부지런히 하다가, 열흘 뒤에 다시 오게.”

  그는 이제 내가 좀 귀찮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하루 내내 쇳물 일을 하다가, 밤이 되어 비로소 좀 쉬려는 사람에게 나는 참 거슬릴 것이다.

  다음 날, 해가 하늘 높이 솟았을 때 나는 그를 다시 찾아갔지만. 그는 보이지 않고 큰 용광로는 칙칙, 하는 소리를 내며 혼자 끓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그가 곧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또 왔는가?”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가 한 열흘 뒤에나 오든지, 아니면 하늘에 해가 하나 더 솟아오르면 그때 보지, 왜 자꾸 와서 귀찮게 하나, 하는 투였는데, 수레에 가득 실린 쇠붙이가 무거웠는지, 잔뜩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앞으로 날마다 이렇게 쇠붙이를 구해 와야 하는가?”

  난 좀 미안하기도 해서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를 만들겠나?”

  그는 수레에서 낡은 쇠붙이들을 주르륵 땅바닥에 쏟아내며 말했다.

  “그래도 많이 주웠네?”

  난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이게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주운 거라네. 오늘은 운이 좋았어.”

  “그럼 자네 해를 만들지 말고, 이걸 죄다 팔면 돈을 더 벌겠네?”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종이 값보다 더 쳐주지 않는다네.”

  “그럼 자네는 종이를 모으지, 왜 쇠를 모으는가?”

  “그건 나보다 더 힘이 없는 사람들이 모아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쇠붙이들을 끌어다 용광로 위에 집어넣었다. 그가 큰 뚜껑을 열 때마다 불꽃이 위로 치솟았는데 그는 얼굴만 조금 찡그릴 뿐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보게, 조심하게!”

  난 그렇게 소리쳤지만, 그는,

  “괜찮네. 날마다 하는 일인데 뭘-.”

하고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좀 머쓱해졌다.

  난 여기에 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열흘째 되는 날 아침, 난 그를 찾아가 같이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까, 아니면 그가 시킨 대로, 그냥 하늘을 지켜보고 있을까, 생각에 빠졌다.

  비간 좀 내린 새벽하늘은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어 7시가 다 되어도 어두웠는데, 해는 보이지 않고 어두침침했다.

  난 그가 빨리 해를 하늘에 띄워주길 바라면서도, 어떻게 해를 하늘에 올린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간다는 건 그에게 왠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 가서 그걸 꼭 보아야 할까? 그건 나를 위한 것이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을 먹고 한참이 지나도록 하늘은 밝아오지 않았다.

  나는 내 일을 하면서 예전처럼 안달하지 않았다. 하루를 기다리는 것도, 1년을 기다리는 것도, 10년을 기다리는 것도 나에게는 이미 똑같은 일이 된 것 같았다.

  하늘은 희멀겋게 깔리어 있었고, 길 건너 동쪽 높은 집들 위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떠오른 해는 이제 동전 만하게 희멀건 하늘 한가운데 박혀 있었는데 전혀 빛이 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동쪽 달맞이 산 옆으로 크고 밝고 붉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새빨간 불덩어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큰 쇳덩어리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새빨갛고 동그란 불덩어리가, 저렇게도 큰 해가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아아!

  나는 기막힌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해를 난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아침이 열린 것이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난 가슴과 얼굴과 이마가 뜨거워졌다.

  여기저기서 그걸 바란 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모두들 머리를 숙이고 바쁘게 서두르며 어딘가로 달리고 있었고, 하늘에 새로운 해가 저렇게 크고 밝고 붉게 떠올라도 고개를 들어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로 쫓기듯, 쫓기듯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해가 하나가 떠 있든, 새로운 해가 하나 더 떠 있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는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에 곧 그런 사람들도 가슴에 꼭꼭 싸맨 옷깃을 풀고, 이마에 맺히는 땀을 식히려 창문을 내리고, 비로소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오늘 따라 해가 왜 저렇게 커?”

  “왜 저렇게 해가 붉지?”

  “그 해 참 크네.”

  “아이, 눈부시게 왜 저리 밝아!”

하면서, 그것이 강빈이 용광로에서 쇠붙이를 녹여 만든 해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이미 아침에 떠오른 해는 하늘 한가운데서 구름에 가리어져, 잘 보아야 겨우 동전만한 크기로 박혀 있었으니까!

  강빈을 생각하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강빈은 무거운 쇳덩어리를 지고 산을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불덩어리를 막으려 몇 겹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지개에 흙을 쌓아 싣고는 한발 두발 달맞이 산을 올랐다.

  “영차, 영차.”

  그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픔을 잊고 불덩어리를 날랐다.

  그가 이 쇳덩어리를 다 나르면 식구들이 열흘은 먹고 살 것이다.

  “영차, 영차!”

  강빈은 그럴수록 온 몸에 신이 나고, 힘이 나서 산을 오르는데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추운 겨울 아침에 산꼭대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는 큰 강을 끼고 있어서 그리 높지는 않아도 매우 비탈져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이 불덩어리를 하늘에 띄워 올릴 곳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지개를 받치고 있던 강빈은, 쓰러질 듯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지개를 버티고 섰다. 발아래 저쪽으로는 아침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의 등 위로는 그 큰 불덩어리가 이글이글 타오르며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이, 쉭쉭,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람이 잠들고, 강물마저 숨죽여 흐르지 않을 때였다.

  강빈은 갑자기 등에 지고 있던 지개를 맨 채 그대로 앞으로 거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 큰 불덩어리가 쇳덩어리가, 땅으로 굴러 떨어져 강물에 빠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아아!

  강빈은 다시 보았다.

  자기가 만든 붉은 쇳덩어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그의 두 뺨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렇게 뜨거운 쇳덩어리를 지고도 그는 지지 않았고, 이제 그것이 불덩어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을 달리는 사람들은 서두르고 안달하며, 저마다 해를 향해 욕을 하는 것이었다.

  “염병할,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워!”

  “제기랄, 해마저 지랄이네!”

  “빌어먹을!”   

                                  - 끝 -    2009/1/21

               서부 역마차                      

2007/12/25

                                            김   영 관 (소설가)

  적에게.

  적은 노래할 때 난 우울하다면 뭔가 잘못 된 것이다.

  내가 적에 대한 글을 많이 쓰는 것은 적이 많기 때문이며, 이 사회에는 안

그런 척 하지만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안의 적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상의 적도 있다. 상대는 정말 참을 수 없어 기침을 쏟아냈는데도,

  ‘나의 적이다.’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재미로 살아야지 깡다구론 오래 살 수 없다.

  지나친 고독은 심장에 좋지 않다. 허파에도 좋지 않다. 콩팥에도 좋지 않다.

  기가 꺾일 땐 쉬어야겠지.

  적은 네 심장을 겨누고 있으니 늘 방어하고 공격하라! 그러면 적을 상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찮은 생각만 하고 있는 벌레 같은 놈들 생각은 그냥 던져버리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라!

  물러나 뒤에 앉아 있으면 잠시 외롭겠지만 인생이란 원래 고독한 것이 아니더냐!

              2008. 1. 4                                            

                                                 적이.

  이 편지를 받아든 적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숨이 가빠 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적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 왔다. 적은 적이 아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고, 인격과 덕을 갖춘 사람이란 것은 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왔던 네 마음의 옹졸한 분노가 곧 적이다.’

  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왔던 마음의 옹졸한 분노가 적이라. 그러면 적의 적은 누구인가? 친구인가? 친구와 적도 없다면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늘과 땅과 나무와 동물과 사람들?

  결국 적에겐 친구도 적도 없지만 적에겐 한 가지 약점은 있다.

  그건 바로 행운으로 다가설 일을 자주 그르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자우편이 왔을 때,

  ‘이거 보나마나 쓸데없는 편지일 거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에게 좋은 편지가 한번도 오지 않는다거나,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일어났을 일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적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설사 없더라도, 좋은 소식은 분명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더니 정말 오지도 않던 좋은 소식이 오더라는 것이다. 설령 오지 않더라도 기분은 덜 나빴다.

  이건 무슨 꿈을 품고 살아라나는 행운 법칙 같은 책 이야기가 아니라, 적이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베풀고 갈고 닦았던 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돌아서 바람 거리로 향했다.

  황량한 서부의 거리에는 차갑고 휑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중절모를 눌러 쓴 적이 총을 빼들었다.

  “뒤돌아서야지.”

  내 말에 적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각각 백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갔다.

  아흔 여덟, 아흔 아홉, 백.

  빵! 빵!

  동시에 돌아선 두 사람의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났다.

  그러나 적은 너무 멀리 걸어갔기 때문에 둘 다 맞추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몸에서는 70, 80, 90년대의 최루탄 냄새가 났다. 툴툴 털 때마다 재채기가 나왔다. 그것이 내 코와 귀를 조금씩 갉아먹어 오늘도 왼쪽 귀가 멍하다.

  난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와 쉬었지만, 잡힌 사람들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거나, 몇 십 년씩 감옥에 있었고, 그 아들, 딸도 아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고문을 받다 죽었다. 죽기 전 그 차디찬 손을 어미가 자기 가슴 속 젖꼭지에 대었더니,

  “엄마-.”

하며 딸은 숨을 거두었다.

  진짜 간첩이나 폭력범을 잡지,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사람들의 아들과 딸을 잡았는가! 70년대의 이야기라 하기엔 아직 살아 있는 그 부모의 가슴은 아프다!

  비록 건방과 오만에 찼지만 나는 살아 있는 역사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

  적은 겸손했다.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감추지도 않았으며 남을 함부로 의심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난 남을 잘 믿지 않았으며, 곧잘 욕을 했다.

  적은 한참 동안 결과를 기다릴 줄 알았지만 난 안달하곤 했다. 적은 침묵 속에 고독을 참아내었지만, 난 얼마 견디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나의 적이 될 수 없다.

  적은 다른 곳에 있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

  좋다. 지성이 없어도 마음만 어질면 된다. 그러나 둘 다 없는 놈들은 그야말로 사회를 좀 먹는 못된 놈들이요, 상대하기조차 싫은 적이다.

  십중팔구는 그런 놈들이다. 천 명이면 팔백 명이 그런 놈이요, 천만 명이면 팔백만 명이 거리나 학교에, 회사에 돌아다닌다. 착한 백만 명은 잘 드러나지 않고 또 나머지 백만 명은 참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회사고, 학교고, 거리고, 전철 안이고 피곤한 것이다. 바로 그런 놈들만큼 나쁜 놈들이 백성과 나랏돈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놈들이다.   

  이제 적은 다 정해졌다.

  내 마음의 적과, 중절모를 눌러 쓴 적과, 버러지 같은 적이다.

  이 가운데 제일 약한 놈은 누구일까? 버러지다.

  그럼 제일 센 놈은 누구일까? 중절모? 마음의 적?

  그걸 모르겠다. 아니 중절모는 자주 만날 수가 없다. 마음의 적은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적이 더 강적이라고?

  그걸 내가 아나!

  그러나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나니까, 제일 만나기 싫은 적은 제일 자주 만나는 마음의 적이요, 그 다음이 버러지, 마지막이 중절모고, 반대로 진짜 제일 센 놈은 중절모요, 그 다음이 마음의 적, 꼴찌가 버러지라고 치자.  

  버러지 이야기 자꾸 하면 나도 버러지가 되니 그 이야기는 말고. 중요한 건 마음의 적과 중절모다. 중절모는 어떻게 보면 멋있는 놈이다. 바람 부는 황야에 나타나 총 한 방 빵, 쏘고 누런 먼지 이는 벌판으로 말 타고 다시 사라지니, 내가 따라잡을 수가 있어야지. 자식, 뒷모습 멋있기는 멋있는데 어디 춥지나 않을는지, 괜히 걱정도 되는 게 싸우다가 정도 들었나 보다.

  원래 왜 싸웠다는 말인가?

  생각과 몸짓이 달라서? 그게 도전적이어서? 영토와 종족을 확장, 보존하려고?

  나와 중절모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다 맞는 말이라고 치자. 그래서 아직도, 영원히, 그래 보았자 한 50년 남았을 터인데, 더 싸우겠다는 말인가?

  나는 중절모와 더 안 싸우기로 다짐했다. 그도 지금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중절모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이제 꽤 늙었을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아직 그가 서부에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를 서울에서 보았다고도 했다. 문제는 그 서부가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냐, 애리조나냐, 뉴멕시코냐,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도 한번 못 가본 촌놈이 어디 그 허허벌판 3개주를 돌아다니며,

  “혹 중절모 쓴 동양인 못 봤소?”

하고 돌아다니다간, 진짜 총잡이한테 총 맞을지도 모른다.

  ‘혹 그가 서부에서 역마차를 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 내 머릿속에서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서부에서 역마차를 끌고 있다, 서부에서 역마차, 서부 역마차?’

  하여간 나는 그를 찾아 서부역으로 향했다.

  잠깐, 여기서 서부역을 모르는 서울 촌놈들에게 말하자면, 서부역은 바로 서울역 바로 뒤쪽이 서부역이다. 그러니까 서울역 앞쪽(기차에서 내려 사람들 거의 다 나오는 곳)으로 나와 왼쪽으로 가면 숭례문, 시청 쪽, 오른쪽으로 가면 용산이다.

  왜 그가 서울 서부에서 역마차를 끌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내 추측이 맞아 도대체 그를 만날 수나 있다는 말인가?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지.”

  천신만고 끝에 만난 그의 첫마디였다.

  “누구를 태우고 다니는가?”

  마차는 비어 있었다.

  흔히 요새 관광용으로 몇 대 다니는 그런 마차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진짜서부 시대에 달렸을 나무 바퀴는 삐거덕거리고, 겨우 비만 가리게 덮은 지붕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마차였는데, 중절모는 옷까지 카우보이처럼 다 떨어진 낡은 회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서부 시대를 달리는 것보다 서울이 더 힘들군.”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간혹 인디언이 나타났지만 그에게 서울은 그 서부 시대보다 더 삭막한 곳이었으리라.

  “이제는 그 고향도 그립지 않겠군. 차라리 서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제 그럴 순 없겠지.”  

  중절모는 초췌해 보였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나?”

  “자네 마차의 바퀴처럼 흔적을 남기고 있지.”

  “바퀴의 흔적은 마차가 달리니까 자연히 난 거지 일부러 낸 게 아니네.”

  “열심히 살고 있군. 그런데 자네는 왜 역마차를 달리는가?”

  “즐거우니까.”

  “날마다 즐거운가? 매 시간마다 그렇지는 않겠지?”

  “자네도 서부에 있을 때보다는 쫀쫀해졌군. 그냥 즐겁게 살려는 게지.”

  “그래서 사람도 짐도 없는 빈 수레를 끌고 다니는가?”

  “천만에. 때로는 사람도 타고 짐도 싣는다.”

  “자네가 남긴다는 흔적은 무엇인가? 사실 흔적이 남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낙엽처럼?”

  “아니, 자네가 하는 일말이야!”

  “말하지 않겠네.”

  그때 찬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외투와 역마차의 낡은 지붕을 훑고 지나갔다.

  배워도 깨친 것이 적다면, 도무지 예술성라곤 느껴지지 않는다면 무미건조한 것들이다. 재미와 흥미와 관심과 훌륭한 지성이 동시에 느껴지지 않는다면 나에겐 재미없는 일일뿐이다. 늘 그것들이 예술적 냄새와 함께 곁을 맴돌아야지.

  해학이라도 관계없다. 자신을 갉아먹는 억지웃음을 자아내지 않으면 된다. 나지막하지만 목소리가 우렁차고, 미소 짓지만 홀로 눈물짓고, 나는 그런 적을 바랐다.

  그러나 내 오십 평생에 만난 그런 적은 딱 이 역마차 하나뿐이었다. 중절모도 그때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나는 중절모와 역마차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마차는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중절모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세월에 따르지 않고 변했다. 세월에 따른 것은 혼인뿐이었다.

  중절모가 나와 결투를 했을 때는 둘 다 젊었다. 아직 채 익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왜 역마차는 나에게 두 번째 결투를 신청했을까? 그것도 하필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나는 그 결투를 거절했다.

  첫째, 미국에 가기가 싫다. 여권, 비자, 표 끊기는 물론이고, 비행기 몇 시간씩 기다렸다 타고 간 미국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열 손가락 지문과 얼굴 사진 찍기는 더더군다나 정말 싫다!

  둘째, 총이 없다.

  셋째. 이제 결투할 나이가 아니다. 왜 싸운다는 말인가? 아니 왜 역마차가 결투를 신청했는지 이유라도 먼저 알아야겠다.

  그러나, 먼지가 퀭하게 이는 서부역에는 며칠째 역마차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며칠 동안 그를 본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역마차라고요?”

하며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미친놈으로 다루었다.

  혹 어떤 이는,

  “아, 그 역마차! 밤이 되어야 문 열어요.”

하며 자기가 언젠가 마셨던 <역마차> 술집을 이야기했다.

  적은 너에게 긴장감을 준다. 그것도 너무 느슨해졌을 때 말이지, 늘 긴장해 있으면 적이 더해주는 긴장감은 위협에 가깝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느슨할 때가 많았다. 그 점에서 이번에 적 역마차가 나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역마차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마차에 타라!”

  내가 겨울 한밤 추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쯤 역마차는 혜성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고맙다, 역마차야!”

  그가 나에게 따뜻한 커피를 한잔 주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커피 한잔만 더 주게.”

하고 내가 말했다.

  “아껴 마셔야지, 이 밤을 지새우려면.”

  이럴 때 역마차는 꼭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도 일단 마시고 보세.”

  성질 급한 내가 보온병 뚜껑을 아래위로 딸깍딸깍 흔들며 말했다.

  “좀 참게.”

  역마차는 매정하게 내 손에서 뚜껑을 빼앗아 보온병 대가리에 탁, 하고 덮고 말았다.

  “지금 어디 가는데?”

  좀 화가 난 내가 무디게 말했다.

  “결투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이 미친 놈, 하고 말해주곤 싶었지만,

  “꼭 오늘 결투를 해야 되겠나?”

하고 말은 영 딴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래.”

  역마차는 그냥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새까만 어둠 속으로 돌렸다.

  때각때각, 덜컥덜컥, 역마차는 한밤의 도시를 뚫고 어딘가로 달리고 있었다. 방향이 용산 고등학교 쪽인 줄 알았지만, 역마차는 어느새 남산을 넘고 있었다.

  어느새 난 뒤쪽 짐칸에서 꾸역꾸역 잠이 들었다.

  덜커덕덜커덕 역마차는 차갑고 차가운 서울의 새까만 밤을 내달리고 있었다.

  “이히히잉!”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말이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모래 언덕 같은 것이 보이고 아직 실눈썹이 보이는 그믐달이 칼처럼 밤하늘에 박혀 있었다.

  저걱, 저걱, 발바닥에는 모래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모래 위 양쪽에는 무슨 건물들이 성처럼 솟아 있었다.

  ‘성인가?’

  나는 잠에서 금방 깨어난 터라 아직 멍했다.

  “자, 이제 시작할까?”

  분명 역마차의 목소리였다.

  ‘뭘 말인가? 결투를?’

  난 빨리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땐 좀 일찌감치 자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건데 방심한 탓이다. 그리고 춥기는 또 오지게 추웠다.

  “이런 빌어먹을. 결투는 꼭 이럴 때 한다니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깃을 여미고 목뒤에 매달린 방한모를 덮어 썼다.

  그러나 아무리 내 옆구리를 더듬어 보아도 총이 없었다.

  “이런 제기랄!”

  몇 번 그렇게 중얼거릴 때마다 터져 나오는 차가운 입김이 서서히 나를 깨우고 있었다.

  “여기는 서부가 아니다! 총은 없다.”

  역마차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또렷한지 밤하늘의 차가운 기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은하수!

  얼마 만에 바라보는 은하수 물결인가? 비록 은빛은 아니더라도 은하수가 구름처럼 뿌옇게 이어져 있었다.

  “그럼 결투는 무엇으로 하는가?”

  이제 나도 지지 않고 기백으로 맞섰다.

  “허공을 가르는 맨손으로 한다! 하하하!”

  ‘자식, 웃기는. 그런데 웬 맨손?’

  나는 뜻밖의 말에 좀 어리둥절했다.

  “가까이 오너라!”

  어렴풋이 보이는 역마차의 손에는 총이 없었다.

  “네가 오면 되잖아!”

  나는 밀리지 않았다.

  선점한 것은 역마차였지만, 나도 박력은 남아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결투가 아니라 뜻밖에 결별의 악수였다. 차디찬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역마차는 나를 다시 보았을 때 이미 결별의 결투를 신청한 것이었다. 인생에 지친 자들이 흔히 느끼는 혼자가 편하고 모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 역마차는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태우고 정말 어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었으니까.

  가까운 곳에 한강이 흘러가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중절모가 역마차를 끌고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역마차를 찾지 말아야 옳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도 다 바르게 살 사람들이다. 나는 그와 좀 더 일찍 만나고 좀 더 일찍 헤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옳게 깨친 자는 적이 아니다!

                               - 끝 -

                                               2008/2/10

        해 탈 문

                                                               김 영관(소설가)

  아침부터 아래층에서 부부 싸움이 크게 일어났다.

  남자의 고함 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차까지 오고야 말았다.

  불안한 출근길이었다.

  “아빠, 왜 경찰까지 오고 그래?”

  등굣길에 내 차를 탄 아들이 묻는다.

  “음, 크게 싸웠나보지, 뭐.”

  난 하찮게 대답했지만, 영 기분은 찜찜했다. 또, 사실, 경찰차까지야 오지 않았지만 나도 아내와 그렇게 싸운 생각이 떠올라 이제 고등학생이 된 아들 앞에서 미안했다.

  3월이라 하지만 아침엔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에 어제는 황사 바람까지 불어 쌀쌀한 날씨였다.

  차는 순환도로를 달렸다.

  양보하는 차는 보기 힘들 정도로 모두 서두르고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아찔한 사고를 당한다. 핸들을 몇 번이고 힘껏 움켜쥐어야 한다. 

  차가 밀리는가 싶더니, 아뿔싸, 저 앞에 무슨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로수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저기 사고 났지. 저 봐! 차가 옆으로 뒤집혔네!”

  “어디, 어디, 잘 안 보이는데-.”

  아들은 눈을 찌푸리며 차창 앞을 보았다.

  “저 봐, 사람이 문을 열고 위로 나오잖아! 저런, 어떻게 박았기에 나무  뿌리가 다 뽑혀.”

  경차인 내 차도 겨우겨우 사고가 난 차 옆을 빠져나왔다. 금방 폭발할 것도 같아, 얼른 지나쳤지만 보통 사고가 아니었다.

  매일매일 미친 듯이 운전하니 사고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오늘 아침은 큰 사고였다.

  “차 조심, 불조심해!”

  나는 잘 가라고, 손짓을 하며 내리는 아들에게 말했다.

  돌아서는 길에 119구급차와 소방차들이 몇 대씩 달려가고 있었다. 반대쪽 길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가로수는 통째로 뽑혀 있었고, 사고 차는 앞쪽이 너덜너덜 망가진 채로 세워져 있었다. 다친 사람들은 벌써 실려 갔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밀린 차들이 1킬로쯤 늘어서 있어 견디지 못하는 몇몇 사람은 함부로 유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박았으면 저렇게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옆으로 차가 튕겨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 길이 굽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순환도로 가운데서도 곧바른 길이었다. 그렇다면,

  ‘반대쪽 차선에서 중앙선을 넘어온 게 아닐까?’

  그렇다, 아까 처음 보았을 때 분명 차는 내 차를 마주보고 있었다.

  안에 탄 사람은 출근하는 양복 차림의 사람이었다. 그가 운전자인지 같이 탄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싸웠을 것이다. 회사 문제를 빌미로 성격 싸움으로 번졌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누가 몇 번이나 무시를 하자, 참다 참다 아랫사람이?’

  내 추측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나만 아는 이야기지, 이걸 누구에게라도 설명하면, 

  “점점 정도가 심하네.”

하며 완전히 미친 놈 다루듯 한다.

  하여튼 며칠 전에 불던 황사가 찬 바람을 몰고 왔는지 아침부터 살갗 속으로 추위가 파고들더니, 동네 떠나가게 싸우는 소리에, 큰 차사고까지 난 것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오늘 당신도 조심해.”

하며 오늘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아내가 장을 보러가고 난 다음부터 하늘이 시커멓게 바뀌는가 싶더니, 눈발이 나리면서 이건 세상이 온통 시커멓다 못해 오히려 노래지고 있었다. 황사 눈이었다. 길 건너 아파트들이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도 누런 황사 눈이 내리 퍼붓고 있었다.

아니 이건 퍼붓는 게 아니라, 대야로 쏟아 붓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송이들이 큰 유리창을 깰 듯이 달려드는 게, 기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난 그만,

  “하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참으로 대단한 눈발이었다. 차들이 조명등을 켜고도 잘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고, 어둡고도 시커멓고 누런 하늘 아래 쏟아지는 황사 눈을 도시 전체가 그대로 맞고 있었다.  

  그러니까 3월의 때 아닌 폭설을 맞으려고 아침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던 거라면 핑계일까? 하기야 쨍쨍하게 맑은 날은 날대로 운전은 개판이었으니까.

  물론 빨리 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게는 서두른다. 그렇게 빨리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인생을 그렇게 서둘러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80가지 산다고 치자. 서두르고 서둘러 80고지에 일찍 도착할 필요가 있을까? 경치도 보며 천천히 가야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뒤에는 아쉬운 산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석하지 않는가? 그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80고개를 넘어 어디로 가려는가? 남는 것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뿐이다. 천천히 인생을 생각하며 걸어라.

  오전 내내 황사 눈은 좀처럼 거치지 않았다. 눈이 한 뼘이나 쌓여 갔다.

  눈발이 지랄 춤을 추듯 누런 하늘에 마구잡이로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지만, 기온이 조금씩 오르면서 녹아내리는 눈 때문에 아스팔트는 흥건히 젖고 있었다.

“2차선을 쌩쌩 달리던 차가 갑자기 1차선으로 휙 끼어드는 바람에 난 부딪치지 않기 위해 맞은편으로 운전대를 꺾었죠. 다행인지 그때 반대쪽엔 차가 없었지만 가로수를 세게 들이박고 말았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탔나요?”

  “예.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아까 내 추측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래도 중앙선을 넘어온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은 맞았다. 다만 회사 사람들과 다투었을 것이라 생각만 빗나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다친 데는 괜찮습니까?”

하고 먼저 물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양복 차림 운전자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충격에서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그럼 끼어들었다는 차는?”

  “쏜살같이 달아나버리더군요. 뒷거울로 날 봤을 테지만.”

  “아는 사람인가요.”

  “아뇨. 그렇지만 그전부터 차선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엉망진창으로 운전하더군요.”

  “요새, 어디 그런 놈(이차선)이 한두 놈입니까?”

  내 말에 양복 차림(양차)은 날 살짝 쳐다보았다.

  하기야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먼저 속도를 좀 줄이시죠.”

  이번에는 양차가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분을 못 이겨 그런 것이지 양차도 사람은 괜찮은 듯했다.

  “그 놈이 먼저 성질을 긁었군요.”

  내 말이 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차와 속도로 어떻게든 튀어보려는 놈들인데 대게 따끔한 벌을 받은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는 무리죠.”

  “저만 잘 나면 되는, 남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놈들이죠.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뭐가 잘못되고 앞으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텐데 그걸 생각 못하니 진정한 남자(진남)라 할 수도 없지.”

  퍼붓던 눈발도 그치고 빛이 비치고 있었다.

  “난 될 수 있으면 차를 타지 않아요. 운동 삼아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버스나 전천을 타고, 바쁘지 않으면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 또 걷습니다. 그러면 딴 세상을 보게 되지요. 낯선 거리와 마을과 새로운 경치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왼쪽과 오른쪽 뇌를 고루 발달시키는 데 아주 좋다는데요."

  난 또 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차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말을 들으려고 하다가, 다시,

“전 그렇게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

하고 말했다.

  “내가 더 할 걸요. 버스 전철 하나 더 타고 걷고, 덜 타고 내리는데 무슨 여유가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양차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는가 싶었지만,

  “아, 예. 그 참 좋은 말입니다.”

하고 말했다.

  “세상을 걷지 않으면 사람의 참 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자기 마음도 마찬가지죠.”

  이 사람 말에 양차는 앞으로 세상을 좀더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뭘 하는 사람일까?’

  “저 말입니까? 예. 학교 선생입니다.”

  양차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말했다.

  “어디 고등학교?”

  “중학교입니다.”

  “전 고등학교입니다만.”

  이거 헷갈려서 안 되겠다. 그러니까 나는 중학교 선생이고 양차는 고등하교 선생이다.

  “이름이?”

  양차가 물었다.

  “예. 전나중입니다. 선생님은?”

  “양차입니다.”

  난 살짝 웃었다.

  눈바람 탓인지 밤이 되자 몹시 추워 난 퇴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에 벗어던졌던 가죽 장갑과 따뜻한 목도리 생각이 저절로 났다.

  그런데 왜 안경 속의 양차의 눈매가 너무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와 먼저 끼어들었다는 이차선과의 차이는 무얼까?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조금 양보하면 죽는 줄 알고 입에 거품부터 먼저 무는, 단지 그 거품 양의 차이만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양차는 언뜻 보기에는 나보다 더 공손했지만, 그게 양의 탈을 쓴 이리라면? 이차선은 입에 거품부터 무는 치라면? 오십보백보의 차이다. 더군다나 양차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닌가? 학생들을 훌륭히 가르치진 못하더라도 자기 성질을 못 이겨낸다면 선생의 자질은 없다고 봐야한다. 혼자 다니며 사회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이차선보다, 학생들에게 사회성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이라면 더 위험한 것이다.

  아, 그날 황사 눈이 퍼붓던 날, 그런 사람들 이야기 말고 더 좋은 것들을 듣고 볼 것이 진정 없었다는 말인가!

  그래, 황사 눈, 그 내리퍼붓던 눈발이 있지 않았던가!

  황사라고 해도 저 멀리 아시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아닌가! 이번에는 그 황사에 시베리아와 연해주, 두만강을 넘어온 찬 눈발이 겹친 것이다.

  나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인공위성 사진으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본다. 꼭 내가 가르치는 과목이 사회지리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라도 속이 시원해졌다. 겨울이면 아시아 또는 북극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구름들과 여름에는 태평양을 건너 휘몰아치는 태풍!

  비록 드넓은 북극과 남극 대륙을 직접 보거나 히말라야와 고비 사막을 건넌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 대기권에서 유유히 흘러 다니거나 소용돌이치는 구름은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단지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봄기운이 가득하다.

  다섯 개의 난초 꽃이 지고 둘만 남았다. 책상이 살짝만 흔들려도 바짝 마른 꽃이 똑 떨어진다.      

  난초 같은 사람을 만나 본 지는 참 오래 되었다.

  언제였더라? 내가 난사를 만나 것은?

  대학 시절 내가 속세의 번뇌에 시달릴 때 그는 밤마다 내 왼손바닥 위에 내려온 관세음보살이었다. 

  다섯 개의 난초꽃은 모두 떨어졌다. 눈에 보이는 세 개의 꽃잎을 주워 촛대 위에 얹어놓았다. 난초 꽃대도 이제 앙상하게 마르고 있었다.

  난사는 어디에 있을까?

  “혹 난사를 아시요?”

  나는 그야말로 다급할 때를 빼고는 늘 질서를 지킨다는 진남에게 물어보았다.

  “황사 눈이 퍼붓던 날 다음부터는 나도 못 봤소.”

  “?”

  진남은 보통 키에 몸이 다부져 보였다. 

  “그렇지만 양차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진남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어디에서 말인가요?”

  “어디 순환도로라던데. 하여간 그날 양차가 지랄 같은 운전을 한 모양이오. 그것 때문에 난사가 따끔하게 한 소리를 했더니 그걸 못 견디어 하더라군.”

  음. 나는 양차에 대한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겉멋만 들어서 겉으론 예의바른 척하지만 속멋은 도무지 없는 놈이란 것.’

  진정한 실력도, 예의도 없이 겉멋만 들어 남들에게 비켜갈 길을 내주지 않는 놈이 바로 양차다. 그렇다면 그 이차선이란 사람이 바로 난사가 아닐까? 내 추측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양차는 분명 거짓말을 연기하듯 잘 할 것이다.’

  아니, 양차는 태생이 풍류를 즐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운치와 격식이 있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멋이라곤 모르는 불쌍한 치들이 양차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의 거짓말과 폭력성도 거기서 유래하는지 모른다. 운치와 격식이 가풍과 자연과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면 양차는 올바른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자연 속에서 크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집과 땅과 하늘 아래 이루어지는 역사성도 모자라니, 양차가 고둥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마음은 가꾸지 못한 것이다.

  “난사와는 어떤 사이죠?”

  내가 다시 물었더니 진남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아는 사인데.”

  난 좀 겸연쩍었지만,

  “그렇다면 양차와 난사 둘 다 안단 말이죠?”

  “양차는 잘 모르고 난사는 잘 알아요.”

  진남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게 버릇인지 강박관념 탓인지 아직 종잡을 수는 없었다.

  “어디, 바쁘세요?”

  내가 물었다.

  “예.”

  진남은 또 간단히 대답했다.

  “난사한테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예-.”

  이번에는 진남이 예-, 하는 말을 길게 빼더니.

  “그럼 또.”

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원, 사람도 싱겁긴.”

  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진작 싱거운 놈은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난사한테 연락이 왔다.

  “일 있으면 만날 거요.”

하여튼 진남이나 난사나 말하는 거 멋대가리 없기는 누구 뺨친다.

  그러나 난 이차선과 난사가 정말 같은 사림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남과 함께 1.2리터짜리 막걸리를 여섯 병 사들고 난사를 찾아갔다.

  “오랜만이오.”

  난사가 싱긋이 웃었다. 그가 웃을 때는 얼굴에 잔잔한 그리움 같은 돋아났다.  

  옆에 있던 진남은 벌써 막걸리 뚜껑부터 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쉽게 잘 안 따지는지 두루마리 휴지를 뚜껑에 돌돌 말아 힘을 주고 돌리고 있었다.

  “오래 뵙지 못했군요.”

  “그건 번뇌에서 멀어졌다는 말이지요.”

  난사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진남이 막걸리 병뚜껑이 따져서 그런지,뭐가 우스워 그런지,

  “우, 하하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자자, 우선 목부터 한 잔 축이고 보세.”

하고 막걸리 잔을 찾았지만,

  “잠깐 기다려, 이 사람아, 내가 가져올게.”

하고는 난사가 벌떡 일어나 부엌에 가서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사발 3개와 두부와 김치가 가득 담긴 상을 들고 왔다.

  그걸 보자 나도 대번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자자, 그럼 한잔 합시다.”

  이번에는 내가 막걸리를 서둘러 두 사람에게 따라주고 내 사발에도 가득 부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자 세 사람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이, 난형. 그렇게 멋대가리 없이 말하는 거 아냐. 뭐라고? 일 있으면 만날 거요?”

  “이 사람 취했네!”

  순간 진남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난 슬이 확 깨는 것 같아,

  “농담이야. 하하.”

하고 말했다.

  “허허. 전형도 까다로운 데가 있어서 말이야.”

  진남이 말했다. 그래서 난,

  ‘자식, 뭐가 까다롭다는 거야?’

하고 말해주곤 싶었지만 이런 말을 참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 않았다.

  “이차선이라는 사람을 아오?”

  “아니.”

  난사는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 양차라는 사람은?”

  “나쁜 놈이지. 과속과 신호 위반을 밥 먹듯 하면서도 제 잘못은 사과할 줄 모르는 뻔뻔하고 어리석은 놈이지.”

  난사는 그날 순환도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날 난사는 학교에 출근하는 양차가 모는 차를 우연히 타고 있었는데 하도 엉망진창으로 운전하기에,

  “선생님, 아까 횡단보도에서 위험했잖아요. 제발 신호 좀 지켜요.”

하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예에? 괜찮아요.”

하며 전 혼자 중얼거리며 너무 빨리 달리는가 싶더니 결국은 그런 사고를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양차 말로는 이차선이 먼저 끼어들었다는데?”

  “그런 사람 없었어요.”

  난사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결국 양차는 또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 것이다.   

  “요즘도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왼손이나 오른손바닥을 펴면 관세음보살이 오나요?”

  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

  “빛을 내며 괴로운 중생을 돌보아주지.”

  “언제부터 그랬나요?”

  “지금부터 2500년 전부터 그랬지.”

  “많이 도와주셨네요.”

  난사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 두 사람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긴 왜 웃나?”

하며 나와 난사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자기 귀 바로 위 머리 쪽에서 빙빙 돌리며 또라이 손짓을 해보였다.

  “진남 말로는 황사 눈이 퍼붓던 날 다음부터는 잘 못 보았다던데요?”

  “번뇌를 끊었든지, 그날 이후로 더 흐려졌든지 했겠지?”

  “누가요?”

  “중생이.”

  “중생도 번뇌를 끊으면 부처라는 말이군요. 마찬가지로 부처도 번뇌를 못 끊으면 중생이라는 말처럼.”

  “이봐, 자제 둘이. 아까부터 왜 자꾸 실실 웃어. 내 욕하는 거 아냐?”

  진남이 제 잔에 이젠 홀로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말했다.

  난사는 곡차를 한 잔 더는 마시지 않았다.

  “아차, 이거 막걸리를 잊고 있었네.”

  그 순간 나는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이봐. 진남. 중생을 구원할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너나 잘 구원해. 저도 괴롭게 살면서 남 생각은.”

  진남은 늘 그런 투로 말했다. 하여튼 나나 진남이나 난사나 말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데는 알아줘야 한다.

  “난 그렇게 옛날처럼 괴롭게 살지 않아.”

  “양차 같은 놈들이 사라지면 완전히 괴롭지 않다는 말인데.”

  난사가 마른 곡차 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그럼 내가 부처가 되게요. 양차 같은 놈이 없어져도 또 그와 비슷한 놈들이 나타겠지요. 그럼 선의 유전자도 진화하겠지요. 이게 다 양차 탓이니 그런 놈이 없어도 재미없어요. 선과 악의 골을 이루어 산이 생기듯.”

  “그렇게 되기까지 자넨 날 많이 찾았지.”

  “네. 그러다가 힘을 얻고, 또 꺾이면 왼손바닥을 밤마다 폈죠.”

  “이봐! 자네들! 지금 나 빼놓고 염화미소 게임하나?”

  진남의 얼굴을 보니 얼큰히 취해 있었다.

  “아차차. 이거 또 미안. 이봐, 난사. 자네도 한잔 더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난사의 빈 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아니 곡차는 한잔이면 됐네.”

  “참, 하여튼 깐깐하기는 둘 다 똑같아. 또라이들은 통해도 뭔가 통해. 어이구.”

하며 진남이이 말하는 바람에 나와 난사는,

  “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나는 진남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나라고 왜 인생이 괴롭지 않겠어. 다 참고 사는 게지.”

  이제 진남이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어느 할머니는 버려진 꽃씨도 주워 다시 심어준다더군.”

  “누가?”

  내가 또 멋대가리 없이 물었다.

  “관세음보살이겠지.”

  진남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난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요새는 그런 일도 하세요?”

  “내가 아니라니까.”

  “아이고, 참네. 진남 말대로 관세음보살이 아니면 누가 버린 씨앗을 주워 다시 심어주겠어요?”

  “하여튼 난 아니네.”

  “참, 관세음보살께서도.”

  “자네 말투도 여성스러워졌구먼. 어울리지 않아. 제 목소리를 가져야지.”

  “어이, 어이, 거기 두 사람.”

  이번에는 진남이 목소릴 내리깔고 말하는 바람에 나와 나사는 좀 겁을 집어먹었다. 그의 두 번째 경고로 우리는 퇴장 당할 판이었다.

  “자네 그 할머니를 잘 아나?”

  “내가 관세음보살이라 그랬지.”

  진남은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자, 이제 각자 제 갈 길 가지? 나도 자야겠으니.”

  난사가 조용히 일어섰다.

  나는 그날 밤 비틀거리는 똥 돼지같이 무거운 진남을 어깨에 메고 온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내일은 비가 왔으면 왔지 이제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아침 기온이 며칠째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낮에는 10도를 넘는다.

  난사와 황사 눈과 중생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중생은 황사 눈이 퍼부을 정도로 추운 날씨에 미리 반팔 옷을 입었다가 혈압이 올라가 신경질을 부렸을 것이고, 괴롭다, 괴로워 밤마다 신음하는 중생을 관세음보살은 찾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생이 스스로 반성하면 관세음보살이 찾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는 다는 게 난사의 생각이었다. 하기야 밤에 관세음으로 변신하는 것도 난사일 테니 어찌 할 수야 없다만, 그래도 그렇지 중생의 병을 다 고쳐주면 안 되나? 또 그것도 한밤중에 꼭 찾아 가야 되나, 훤한 낮에 두루 좀 다니면 좋지, 하여튼 중생이나 난사나 반성 좀 해야 된다.

  진남은 아무리 진정한 남자라지만 그도 세파를 헤쳐 나가기가 만만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단순해서 오해 받을 때가 많고, 우직해서 싸울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안다는 씨앗을 줍는 할머니를 자꾸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난사란 말인가? 하기야 부터는 남녀를 따로 구분 짓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쪽은 뭘 구분하는 걸 딱 싫어하니까. 선과 악이 둘이 아니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니 심신일체라, 이건 난사도 즐겨 쓰던 말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좀 쉽게 이야기해주면 안 되나? 혹 말이다, 부처도 완전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완전하면 사람과 소통도 오히려 안 되었을 것이고 해서 말인데, 쉽게 풀어 이야기를 못하니 괜히 선문답으로 돌려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냐, 내가 난사 정도의 경지에만 올라도 뭔가 달리 보일지도 모르지만, 좀 더 중생을 괴롭힐 생각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도 더 자주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꽃씨를 주웠다면 난사의 집엔 꽃이나 나무, 화분이 많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난사와 할머니와 관세음보살의 고리를 풀 수 있는 기막힌 단서였다.

  “중생을 구해야 된다면 왜 밤낮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오?”

  “먼저 중생이 제 스스로 공부하고 사물을 관찰하고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해야지요.”

  “시끄럽고 더럽고 지랄 같은 놈 천지인 정신없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난 그렇게 말하면서 베란다 쪽을 휙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나무와 화분이 많아 보였다.

  “그 마음을 놓쳐서는 중생은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이 때의 난사는 그야말로 관세음보살 같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낮에는 무슨 일을 하세요?”

  “젊어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씨를 많이 뿌려놓은 것과 같아서 그냥 나가 둘러보기만 해도 거두어들일 일들이 생기지요.”

  나는 드디어 씨니, 거두어들일 일이니 하는 말을 난사에게 듣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이나 약사여래보살은 아무래도 여자 같아요.”

  나는 하고보니 좀 무식한 말을 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식하긴. 부처에겐 그렇게 남녀 구분하지 말랬지. 하여튼 중생들이란.”

하고 난사가 말했다.

  사실 난 난사가 나이가 좀 들긴 했어도 할아버지라면 모를까, 도저히 할머니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나이가?”

  “60. 자네는?”

  “50.”

  난 이거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아 눈알이 뱅뱅 돌았다.

  나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벌떡 일어나보니, 베란다는 온통 푸르렀으며, 열려 거실에도, 방에도 화분들이 곳곳에 보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난초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초가 많네요?”

  나는 베란다 차문을 통해 보이는 아주 큰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난초는 저거 하고 방 안에 하나뿐인데.”

하고 난사가 말하는 바람에 조금 김이 샜다.

  “다른 거는 감나무와 은행나무, 그냥 잡초들이야.”

  “예? 감나무와 은행나무라뇨? 그게 베란다에 있다는 말이에요?”

하며 나나 벌떡 일어서서 베란다로 가보았다.

  삐쩍 마른 나무 꼬챙이가 화분에 꽂혀 있을 뿐 그야말로 온통 잡풀로 무성했다.

  “어느 게 감나무라는 rps지?”

  “응, 거기 이파리 없는 거 있지, 왜. 그리고 은행나무는 저 안쪽 큰 화분에 있는 데 잘 안 자라. 한 20센티 될까? 여름에 은행잎이 나니 은행나무구나 알지. 지금 봐서는 몰라.”

  난 말문이 막힌다고나 할까, 하여튼 좀 실망했다.

  “그래도 한 겨울에 저렇게 푸르다니 신기하지 않아?”

  그건 정말 그랬다.

  “네, 베란다에도 보온이 잘 되는 모양이죠?”

  “아니.”

  “?”

  “밖은 영하 10도가 되도 저 잡초들은 다 살아. 단 물을 주면 안돼. 뿌리가 얼어버리니까.”

  그러고 보니 좀 신기했다.

  “이 텔레비전 위에 있는 건 선인장인가요? 잎이 무성하네.”

  “처음에 저렇게 줄기가 무성하지 않았는데 텔레비전 위에 얹어놓고부터는 저렇게 잘 자라네. 선인장이 사막처럼 더운 데서 잘 자라잖아. 그래서 그런가봐.”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는 난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관세음보살 같기도 했다.

  “난사. 혹 밤마다 관세음보살로 변신하나?”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짜고짜로 물어보았다.

  “그래서 자네 왼손바닥에 나타나나 이 말이지?”

  “아니, 난사가 그걸 어떻게?”

  “그래서 나와 자네가 친해지지 않았나.”

  “그럼?”

  “관세음보살.”

  난사는 대답 대신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이쪽 계통은 뭘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빙 둘러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한참 걸리는 게 문제다. 성질 급한 현대인들 더 참아라, 하고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이봐. 난사. 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면 여간 바쁜 게 아닐 텐데-.”

  “나를 찾는 마음의 문제지, 몸의 문제가 아니니까.”

  “자네 잘못 하다간 이상한 보살로 오해 받겠어?”

  “관세음보살.”

  난사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모았지만, 난 혼자 흥분하고 있었다.

  “흥분하거나 놀라거나 분하거나 화를 내거나 억울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다스릴 줄 알면 그게 관세음보살이지. 제 마음 자리 찾는 걸 이젠 잊지 말게.”

  난 그렇게 난사와 헤어졌다. 얼마 동안은 그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상대를 물리치지 못했더라도 분한 마음을 다스려 빨리 마음자리를 찾아야 된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남은 55살이다. 이 나이가 되면 서로 만날 일이 거의 없게 된다. 그래도 자주 만난다면 세상에 쓸데없는 미련이 많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난 그들을 몇 년에 한번 만나곤 했는데, 어느 날 뜸하던 진남이  나타났다.  

  “관세음보살도 생에 지치면 얼굴이 일그러지지.”

  진남이 말했다.

  “?”

  “요즘 난사 얼굴이 말이 아니야.”

  진남은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도 생에 지친다는 것인가?”

  “사람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그렇다는 말이네. 그렇지 않을 때는 평온히 잠자는 부처의 모습이지.”

  “자네 혹 그 할머니를 말하는 것인가?”

  “내가 본 그 할머니의 평온한 얼굴도 관세음보살이었지. 그런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버려진 씨앗을 심는 것도 그렇고.”

  “그럼 잠자는 아기의 얼굴도, 평온히 잠든 아내의 얼굴도 관세음보살이란 말이야? 아이가 시끄럽게 울거나, 아내가 화를 낼 때는 사람이란 말이고.”

  난 내가 묻고도 너무 단순하게 물은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

  진남은 대답 대신에 그렇게 말했다. 그때 진남의 모습은 난사와 닮아 있었고, 또 어찌 보면 관세음보살의 얼굴 같기도 했다.    

  ‘그럼 내 얼굴은?’

  난 생각이 거기 미치자 좀 부끄러워졌다.

  늘 찡그린 얼굴에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 약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생각과 언행. 그리고 내가 잠자는 모습은 결코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꿈을 꾸었는데 왼쪽으로 오래 누워서 심장이 눌리면 늘 기분 나쁜 꿈을 꾸곤 했다.

  “꿈은 심장과 관계가 있다더군.”

  진남이 말했다.

  “자네는 어리석은 게 아니라 약은 거야.”

  진남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나쁜 놈을 물리치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자네 자신보다 못된 놈들을 이기기 위해서겠지. 그래서 자네 얼굴은 평온치 않은 거고.”

  나는 잠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에 똑바로 주먹 한방 맞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자넨 밤마다 관세음보살을 찾았겠지.”

  나와 진남 사이에 알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더 깊어지지 않기 위해 난 딴 말을 했다.

  “요즘은 그 분 본 지도 오래 되었는데.”

  “자넨 난사를 만났으니까.”

  “그럼 난사가 진짜 관세음보살이라 말인가?”

  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넨 혹 약사여래보살?”

  내가 농담을 했다.

  “하하하.”

  진남이 대답 대신에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전나중이 내가 약사여래보살인 줄 알아챈 것 같아.”
  “하하하. 그게 무슨 그리 큰일인가. 다만 이제 그를 자주 못 본다는 게 아쉽지만.”

  “난사, 자네 다시 중생이 되어가는구먼.”

  “그가 해탈문 가까이로 오고 있는 게지.”

  난사와 진남 사이로 온화한 햇살이 꿈길 따라 내비치고 있었다.

  난 그날 이후로 난사도 진남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을 곧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직 속세에 있는 나를 불안하게 또 든든하게 만들었다.

                              - 끝 -     2008/3/16